목양칼럼 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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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Total 218건 9 페이지
  • 170
    영상칼럼 08-03-2020 Publish on August 03,2020관리자
    샬롬! 오늘도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들에게 평안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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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9
    영상칼럼 07-26-2020 Publish on July 27,2020관리자
        샬롬! 주님의 위로와 평안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기쁜 마음으로 여러분 모두를 찾아뵈며 영상칼럼을 함께 나눕니다.  https://youtu.be/7SrIir_mt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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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8
    영상칼럼 07-20-2020 Publish on July 20,2020관리자
    매주 걸어온 이길. 늘 앉아서 드리던 그자리. 함께 기뻐하며 웃음짓던 사람들. 그 동안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현실을 우리가 맞이 합니다.  지나간 기억들은 흔적으로 남는다고 하지요. 그 흔적 가운데 소중한 기억들이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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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7
    영상칼럼 07-13-2020 Publish on July 16,2020관리자
    샬롬!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들에게 평안의 인사를 드립니다 . 샬롬은 평안, 평강이라는 의미이지요.  https://youtu.be/AYCW2DgC-_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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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6
    목회자와 성도의 올바른 관계 Publish on July 08,2020홍삼열
    히브리서에 보면 성도와 목회자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는 구절이 여럿 등장한다. “너희는 삼가 말씀하는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모세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12:25절). 이것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던 모세를 사람들이 거역했을 때 그들이 죽임 당한 예를 제시하면서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더 큰 벌을 받게 될 것인지를 생각하라는 경고의 말씀이다. 그래서 이 구절은 일단 설교하는 목회자에 포커스를 맞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포커스를 맞춘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러나 이 구절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거역했을 때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기본 원칙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다음 13:17절에 보면 왜 목회자에게 순종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여기에 성도들이 목회자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가 나오는데, 그렇게 해야 목회자가 기쁨으로 사역을 감당하고, 그럴 때 성도들에게 유익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신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는 목사에게도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가? 13:7절을 보자.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성도는 목회자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관찰할 필요가 있다. 목사가 뭘 잘못하나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라는 말이 아니라, 길게 봐서 목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목회하는지를 살피고 그의 믿음을 본받아 살라는 말이다. 물론 이것은 좋은 케이스를 염두에 둔 권면이다. 목사가 맡겨진 직무를 제대로 수행했다면 그의 “행실의 결말”이 선할 수밖에 없고, 성도는 그것을 진실된 믿음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서 목사의 믿음을 본받아 사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목사의 행실의 결말이 너무나 악한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그런 상황에서도 성도는 그의 믿음을 본받아야 하겠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목사라고 해서 무조건 순종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단들도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3장 9절에 보면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교회에서 올바른 교훈만 선포되면 참 좋겠는데, 말세이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다른 교훈”이 선포된다. 그럴 때 성도는 그런 교훈에 끌려 다니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잘못된 교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것을 분별하여 거부해야 한다.   목사와 성도의 관계에서 건강하지 못한 양 극단이 있다. 한쪽 극단은 교인들은 무조건 목사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다. 목사는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선택한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목사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절대로 토 달지 말고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반대 극단은 목사는 교인들이 헌금한 것으로 생활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목사는 교인들이 원하는 대로만 사역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목사의 목회방침이나 사역의 방향까지도 좌지우지하려고 한다. 그래서 만일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교인들이 싫어하는 방향으로 교회를 움직이려고 하면 적극 방해를 하거나 목사를 쫓아낸다. 이 두 가지 태도는 모두 건강하지 못한 태도이다. 목사를 하나님처럼 섬겨도 안 되고, 반대로 목사를 교인들의 비위를 맞추는 종으로 생각해도 안 된다. 그러면 목사와의 관계에서 어떤 태도를 가지는 것이 성경적일까?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목사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그가 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이기 때문인가? 당연히 그런 이유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목사는 교인들의 영혼을 보살피라고 하나님의 특별 명령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 모든 목사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어떻게 성도들의 영혼을 돌보았는지 낱낱이 보고해야 한다.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히 13:17).   성경은 성도들에게 목사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이것이 무조건적인 복종일까? 성도들은 목사의 말이라면 따지지 말고 무조건 복종해야 할까? 예를 들어, 가짜 목사의 경우에도 그 사람이 교회를 담임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말을 무조건 따라야 할까? 그렇지 않다. 우리 주변에 보면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이 있다. 이단들도 너무나 많이 있다. 그런 경우 생각 없이 무조건 따라가면 안 된다. 단순히 목사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따라가면 큰일 난다. 목사가 성경 말씀대로 제대로 가르치면 그대로 따라가야 하지만, 성경 말씀대로 가르치지 않고 자기 맘대로 가르치면 절대 따라가면 안 된다. 그렇게 따라가다가 그와 함께 지옥에 가게 된다.   목사가 성경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고 그 가르침대로 성도들을 이끌고 있는 경우라면, 성도들은 그 목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히브리서 13:17절에 보면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여기에 보면 “순종”과 “복종” 두 가지 단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다. 이 둘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대개 ‘순종’은 좋아서 순순히 따르는 것을 말하고 ‘복종’은 싫어도 억지로 따르는 것을 말하는데 원문에도 그렇게 되어 있는가? 그렇다. 순종은 “peithesthe”(설득되다)로 되어 있고 복종은 “hupeikete”(항복하다, 저항을 중지하다)로 되어 있다. 즉 순종은 정신/이해의 차원에서 설득되어 따르는 것 즉 동의하는 것을 말하고, 복종은 의지의 차원에서 자신의 뜻을 굽히고 따르는 것을 말한다. 성도는 마음으로 목사의 말에 동의할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따르는 것이 좋다. 때로는 성도의 입장에서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에도 하나님이 주신 권위에 순복하여 따르는 것이 좋다. 그럴 때 목사가 즐거움으로 사역할 수 있게 되고 그럴 때 성도들에게도 유익이 된다. 물론, 목회자가 이단사상을 가르친다거나 성경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을 하라고 요구한다면 성도는 당연히 그것을 거부해야 한다.   히브리서는 13:17절에서 목회자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권면한 후에 다음절 18절에서 이런 설명을 덧붙인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왜 17절에서 목회자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말한 다음에 18절에서 기도해달라는 말을 하고 그다음에 “우리에게는 확실히 선한 양심이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히브리서의 독자들 중에는 기본적으로 목회자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목회자가 어떤 말을 하거나 어떤 행동을 하면 무조건 의심부터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목사가 부자를 심방하면 돈만 밝힌다고 하고, 사람들 앞에서 누군가에게 위로의 말을 하면 그 사람만 편애한다고 하고, 성경의 원칙에 맞지 않는 것을 지적하면 자기만 미워한다고 하고... 하여튼 모든 것을 삐딱하게 보는 분들이 있다. 이런 분들 덕분에 목사의 직업병이 하나 생겼다. 목사는 어느 성도와 이야기할 때 그분만 바라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다른 사람도 신경 쓴다. 그 지나가는 사람이 목사를 쳐다보는데 목사가 그 사람을 보지 않으면 자기를 무시한다고 하는 사람이 꼭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꼭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서 목사는 한 사람에게만 집중하기가 힘들다. 이런 분들을 보면 목사의 마음이 너무나 아프다. 어떤 교회이든지 당연히 이런 분들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제로 목회자를 믿지 못하는 분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그런 분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잘 전달되지도 않고 하나님의 복이 임하지도 않는데 스스로는 그것을 모르고 있으니 너무나 안타깝다.   만일 목회자가 성경의 원리대로 가르치지 않고 그대로 살지 않는다면 성도는 당연히 이것을 문제 삼아야 한다. 목회자가 가르치는 잘못된 교리나 죄의 삶을 따라가면 안 된다. 소경을 믿고 따라가면 소경과 함께 지옥에 간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목회자를 믿고 그에게 순종해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복이 임한다.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권위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건강한 신앙생활 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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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
    이단을 식별하는 방법, 이단에 빠지지 않는 방법 Publish on July 08,2020홍삼열
    교회 역사를 보면 이단이 없었던 적이 없었다. 이단은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계속 활동하였다. 신기한 점은 예상 외로 멀쩡한 사람들이 이단에 빠져서 믿음의 배가 파선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단이 어떤 특징이 있는지 알고 평소에 잘 대처해야 한다. 이단이라고 해서 이상하게 생겼다거나 말을 비상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너무나 멀쩡하다. 진짜보다 더 진짜같다. 그러니 사람들이 속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11장 13~15절에 보면 이단은 철저히 자신을 가장한다고 하였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사람들이 왜 이단에게 속는가? 겉모습을 보면 그리스도의 사도이고 광명의 천사이고 의의 일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성령의 열매가 없다. 이것이 문제이다. 이것을 보고 우리는 그 사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식별하는 것이다.   유다서 1장 4절에 보면 “영적인 영지주의자들”의 실제 삶의 모습이 어떤지 이렇게 설명한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그들이 이론적으로는 아주 신비하고 영적인 이야기를 하는데, 실제 삶은 어떻다고 하는가? 그들의 삶은 경건하고는 거리가 멀다. 방탕한 생활을 한다. 성령의 열매가 없다. 그리고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부인하지는 않지만, 나중에 가보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 이단은 가만히 아무도 모르게 침투한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러나 어느 정도 이단사상에 빠졌다고 생각하면, 그때 본격적으로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하고 믿음의 배를 파선시킨다.   베드로후서 2장 10절에 보면 이단은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이라고 되어 있다. 이단은 입으로는 대단히 신령한 지식을 가르친다고 떠든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일을 보면 육체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온갖 더러운 일들을 자행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윤리이고 도덕이고 무시하며 산다. 2장 13절에 보면 그들의 민 낯이 드러난다. 그들은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자기들은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다. 교회에서 애찬식을 할 때도 (이때는 아직 성찬식과 공동식사가 분리되지 않았다) 사람들을 속임수로 대한다. 다른 성도들을 음심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죄를 짓는다. 그중 믿음이 강하지 못한 영혼들을 이단의 논리로 유혹한다. 또 그들은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졌다. 신령한 지식을 가르친다고 하면서 어떻게 하면 자기 육체의 욕심을 완벽히 채우는지를 너무나도 잘 안다. 순진한 사람들을 속여서 유혹하고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데 전문가이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성경이 내리는 판결이 무엇인가? 그들은 “저주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이단들이 하는 일을 잘 관찰해보라. 그들은 성적으로 대단히 문란하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는 것이라고 하면서 온갖 성범죄를 저지른다. 탐욕을 채우는 방법도 전문가 수준이다. 어떤 목사는 라스베가스에서 도박을 하다가 발각되었다. 그가 어떤 변명을 했는지 아는가? 건축헌금을 하기 위해 교회 크레딧카드로 도박을 했다는 것이다. 자기는 절대 죄 지은 것이 아니고 성령의 지시대로 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뻔뻔하다. 그런데 그가 담임하는 교회의 교인들이 이 변명을 받아들였을까? 물론 받아드렸다. 일단 이단에 빠지면 이성이 완전히 정지된다. 신앙의 영역에서는 이성적 사고를 하면 안 된다고 평소에 세뇌 당했기 때문에, 일단 그것이 신앙의 영역이라고 설득되면 그다음부터는 이단 목사가 하는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우리는 이단의 잘못된 논리를 검토하여 그들의 정체를 식별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삶을 보고서 진위를 구별해낼 줄 알아야 한다.   또 한 가지 이단의 특징은 기존 교회들을 비방하면서 자기에게 와야만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2장 10~11절,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주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아니하느니라.” 이단은 자신들이 가장 완벽한 영적 지식을 가지고 있고 자기들보다 하나님을 더 잘 아는 사람이 없다고 떠벌리면서 기존 교회는 모두 가짜라고 외친다. 우리는 이단의 특징이 자기만 옳고 나머지는 다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아직 이단으로 판명 나지 않은 목사들의 경우에도 이것을 보고서 위험성을 미리 감지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떤 설교자는 설교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다른 목사들을 욕한다. 다른 목사들은 다 가짜이고 자기만 진짜라고 주장한다. 다른 목사들이 성경 해석하는 것은 다 잘못이고 자기가 성경 해석하는 것만 진짜라고 주장한다.   이런 설교를 들으면 지각 없는 교인들은 혹한다. 정말 우리 목사님만 진리를 설교하고 있고 우리 교회만 올바른 구원의 가르침을 제공한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성경을 아는 성도는 이것이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이단의 잘못을 논리적으로 지적하지는 못해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안다. 평생 들어보지 못한 말을 하고, 정통으로 가르치는 다른 교회들을 다 가짜라고 공격하는 것을 보면 이것이 가짜라는 감이 오는 것이다. 현재 이단으로 판명된 교회들에서는 다 이런 식으로 설교한다. 아직 이단으로 판명되지는 않았지만, 그쪽 방향으로 가고 있는 목사들도 똑같이 이런 식으로 설교한다. 그래서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 다른 목사들은 다 가짜이고 자기가 설교하는 것만 진짜라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설교하는 사람은 사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자기가 모르는 것을 훼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단의 결국은 짐승같이 멸망 당한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베드로후서 3:12).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단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유다서 1장 17~23절에 나오는 마지막 권면의 말씀에 그 방법이 잘 요약되어 있다. 한국에 번역에는 이 단락에 사용된 명령형 동사(verb)와 분사(participle)가 잘 구분되어 있지 않지만, 원문을 보면 명령형 동사가 5개가 나온다.   ①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1:17). 사도들이 미리 경고한 내용이 무엇인가? 앞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단이 나타나서 성도들을 조롱하게 될 테니 조심하라는 말이다. 이단은 우리 가까이에 와 있고 몰래 우리 안에 들어와 있다. 우리는 이 예언의 말씀을 기억하고 이단을 경계해야 한다.   ②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라”(1:21). 신앙은 처음에 잘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그 신앙을 잘 지키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받고 모든 행복을 누릴 수 있었지만, 사단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지 못해서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우리는 믿음을 잘 지켜야 한다.   ③의심하는 자와 육신의 정욕으로 더렵혀진 자를 “긍휼히 여기라”(1:22-23).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의심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왜 죄에 더렵혀진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가? 나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의 마음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를 정죄하고 비판하지 말고, 서로의 짐을 져주고 사랑으로 허다한 죄를 덮어주는 긍휼을 실천해야 한다. 그럴 때 이단이 들어와도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교회가 된다.   ④이단에 빠진 자를 “구원하라”(1:23). 우리는 이단에 빠진 사람을 구원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을 이단에게서 나오게 하는 것은 마치 불에서 사람을 끌어내는 것과 같다. 나도 불에 탈 각오를 해야 할 정도로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얼마나 어려운지 디도서 3장 10절은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이단에 빠진 사람을 구출해내야 한다.   이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대응방법이 필요하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차원의 해결책은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몸이 건강하면 약도 필요 없고 재활치료도 필요 없고 음식조절도 필요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건강하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다른 것들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이단에 빠지지 않는다. 건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누가 건강한 신앙인인가? 건강한 신앙인은 성화의 길을 꾸준히 가는 사람이다. 믿음이 퇴보하거나 정체되지 않고 언제나 우리의 믿음의 목표인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을 향하여 성장하는 사람이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베드로후서 3:18).   베드로후서 1장 4절은 이 성화의 과정을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신성한 성품, 즉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수련을 잘 하면 하나님이 된다는 뜻인가? 범신론자는 그런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그런 생각을 할 수 없다. 우리가 아무리 거룩해져도 넘지 못할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말은 내가 성화의 길을 간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닮아가고 그리스도의 완전을 향하여 매일 성장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떤 것에서 성장해야 하는가? 이어지는 5~7절에서 일곱 가지 구체적인 덕목을 소개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여기에서 처음과 마지막 항목에 주의하라. 기독교인의 삶은 믿음으로 시작하고 사랑으로 끝난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시작할 수 없다. 그러나 믿음은 있는데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성화의 노력이 없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정말 살아 있는 믿음이라면,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 우애와 사랑이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완전이다. 하나님의 성품에 넘치도록 참여하고 기독교의 덕목을 풍성하게 행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풍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벧후 1:8).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말 기대가 크시다. 위의 일곱 가지 덕목 중 반만 가지면 됐다고 만족하시지 않고, 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더 나아가 그 일곱 가지도 풍성하게 가지기를 기대하신다. 하나님이 그 정도로 우리를 믿어주시고 기대를 해주신다. 그러니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성화의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부단한 성화의 노력을 10절에서는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 말은 자신의 구원을 확증하라는 말인데 왜 그래야 하는가? 반복해서 자신의 구원을 의심해야 하기 때문인가? 아니다. 자신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는 말은 성령의 열매로 자신의 믿음이 올바른가를 점검하라는 말이다. 정말 내가 구원받은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 내 삶에 성령의 열매가 열리고 있는지 점검해서 참 신앙을 확증하라는 말이다. 이렇게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무엇인가? 11절이다.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대학교 입학시험볼 때 커트라인이 있다. 실력이 아슬아슬한 사람은 눈치작전을 편다. 그러나 실력이 월등한 사람은 그런 것에 신경 안 쓴다. 자기가 원하는 곳에 그냥 지원서를 내면 된다. 이게 넉넉히 들어가는 사람과 겨우 들어가는 사람의 차이이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 넉넉히 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천국에 들어갈까 못 들어갈까 눈치작전을 펴면 되겠는가? 우리의 신앙의 목표는 넉넉한 구원이다. 우리의 신앙의 모습도 넉넉한 모습이어야 한다. 넉넉히 구원받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완전을 향하여 성화의 삶을 사는 건강한 사람이다. 건강한 신앙인은 이단에 빠지지 않는다. 성화의 삶을 사는 건강한 신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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