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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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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양칼럼] 1월 23일 2023년 Publish on January 27,2023관리자
    지난 주 AP 통신은 다양한 분야의 스포츠 활동을 해 온 아프간 여성들의 사진을 공개했습니다. 각자 자신의 운동 용품을 들고 포즈를 취하거나 훈련하는 장면을 연출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다양한 스포츠 분야라 해도 사진 속 여성들 모두 경기복 대신 운동하기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부르카(Burka)’를 입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슬람 전통 복식인 ‘부르카’는 이슬람 사회의 복장 중에서도 가장 폐쇄적인 의복입니다. 머리부터 발목까지 천을 두르고 망사로 두 눈까지 가리기 때문에, 얼굴 없는 옷이라고 부를 만 합니다. 얼굴이 없으니, 존재를 확인할 길이 없어 사실상 여성의 인권을 깡그리 부정한 것이라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아프간에서는 2021년 8월 미군이 완전 철수하고 탈레반이 집권한 이후 여성에 대한 규제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여성의 대학교육을 금지한 것은 물론, 자국 내에서 공개적으로 스포츠를 즐기는 것 또한 강력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이든 공개석상에서 여성의 얼굴과 몸을 노출시키는 것은 이슬람 율법에 위배된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종교라는 이름 하에 비상식적으로 여성의 인권을 탄압하는 악법을 남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얼굴 없는’ 사진을 찍어야 하는 아프간 여성들의 참담한 표정을 볼 수조차 없으니 정말 답답한 노릇입니다. 흔히 얼굴을 '얼의 꼴'이라고도 하지요. 사람의 얼굴은 그 내면의 풍경을 드러내 주는 창과 같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겉보기만이 아니라, 감추어진 내면의 깊이를 통해서 진면목이 드러나는 모양입니다. 오래 전 함석헌은 <얼굴>이라는 시를 통해 참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예수님을 찬양한 바 있습니다. “그 얼굴만 보면 세상을 잊고, 그 얼굴만 보면 나를 잊고, 시간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고, 밥을 먹었는지 아니 먹었는지 모르는 얼굴, 그 얼굴만 대하면 키가 하늘에 닿는 듯하고, 그 얼굴만 대하면 가슴이 큰 바다 같애, 남을 위해 주고 싶은 맘 파도처럼 일어나고, 가슴이 그저 시원한, 그저 마주앉아 바라만 보고 싶은, 참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말이지요. 본 적 없는 예수님의 얼굴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삶이 그 얼굴을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이유가 그 존재를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인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주장입니다. 그러니 얼굴은 켜켜이 쌓아 온 세월의 흔적으로 이전의 모습을 잃어버린다 해도 지울 수 없는 지문처럼 남아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토록 소중한 얼굴을 잃어버리게 만든 신념이 얼마나 잔혹하고 무모한 폭력인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참 신앙은 우리의 얼굴을 날마다 점검하며, 참 아름다운 예수의 얼굴을 닮아가는 것이라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저 마주앉아 바라만 봐도 좋은, 참 아름다운 얼굴로 가꾸어 가는 것이지요.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란 거울에 비친 여러분의 얼굴은 어떤가요? 서로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고 스스럼없이 인사 나눌 수 있는 그 날을 꿈꾸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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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양칼럼] 1월 16일 2023년 Publish on January 18,2023관리자
    말에도 힘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말은 사람을 긍정적으로 만들지만, 부정적인 말은 사람을 부정적으로 만듭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죽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의 힘입니다. 그렇다면 말의 힘은 말 자체가 갖는 특성일까요? 물론 말의 의미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말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그 말을 하는 사람에 의해 정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이 갖고자 해서 말의 권위 조차 쉽게 얻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권위는 말하는 사람 보다는 듣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줄 때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말하는 사람이 권위를 자기 임의대로 세우려 든다면, 그것은 폭력적인 강요일 뿐 진정한 권위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 자체가 힘이나 권위를 담은 근거는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의 됨됨이를 보고 권위를 부여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역시 말 그 자체가 아니라 말하는 사람으로부터 말의 힘을 발견하는 경우라 할 수 있지요. 말하는 사람의 진실성과 성실함이 그 말에 대한 평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즉흥적으로 나타나는 반응이라기 보다 평소에 보여준 신실한 삶의 태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표창에 가깝습니다. 평상시 당최 신뢰가 가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사람의 말은 신빙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늘 신실한 태도로 신뢰를 쌓아온 사람의 말은 아무래도 무게감이 있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말의 힘이나 권위는 듣는 자의 기준으로 볼 때도 그럴 만한 충분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삶의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에게 권위있는 힘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분의 삶에 대한 우리의 신뢰에 기인합니다.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이지요. 물론 그 믿음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은 변함없이 신실하신 주님의 사랑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사랑의 힘이 너무도 크고 놀라워서 그 앞에 머리를 조아려 주님의 권능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고백한 우리에게도, 그에 합당한 말의 권위를 회복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에게 생명의 힘이 된 것처럼, 우리가 전할 복음의 선포도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세상이 교회와 성도의 말에 권위를 다시 되돌려 줄 수 있도록,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와 제자의 신실함을 회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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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양칼럼] 1월 9일 2023년 Publish on January 09,2023관리자
    십이지 문화(Zodiac Culture)에 따르면, 금년은 계묘년(癸卯年) 토끼띠 해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계(癸)는 흑색이고 묘(卯)는 토끼를 의미하니까 ‘검은 토끼의 해’입니다. 예부터 우리 전통문화에서 토끼는 꾀가 많은 동물로 간주되었습니다. 실제로도 지능이 다른 동물에 비해 높은 편이기는 하지만, 그보다 천적을 피할 수 있는 토끼만의 생존 방식은 민첩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두 눈이 양 옆을 향해 있어 360도를 모두 볼 수 있을 정도로 시야가 넓은 데다 소리에 민감해서 재빠르게 도망갈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사주 팔자를 따지는 것으로 잘 알려진 명리학의 기준으로 보면, 계묘년은 ‘새싹에 비가 살살 뿌려지는 모습’에 가깝다고 합니다. 뭔가 파릇파릇하고 싱그러운 느낌을 주어서, 그 어느 때 보다 희망적인 일들이 많이 생겨날 것이라는 신년 운세를 내놓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꿈 보다 해몽이라는 말처럼, 토끼띠 해가 주는 싱그러운 기운이 실제로도 올 한 해 모든 이들의 삶에 새로운 희망과 기대를 갖게 해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 어떠한 희망과 기대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그것은 한자로 새로울 신(新)자의 의미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서(立) 있는 나무(木)를 도끼(斤)로 잘라내는 모양을 형상화한 것인데, 나무에 도끼로 생채기를 내어 새순을 돋게 한다는 뜻입니다. 말 뜻 그대로, 새로워지는 것은 기존과는 다른 변화를 의미합니다. 게다가 그 변화는 생채기를 내는 아픔을 수반합니다. 잘려나가는 고통을 겪은 뒤에야 새 살이 돋아나는 이치입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고난 없는 부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바울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옛 사람은 죽고, 다시 새 사람으로 부활하는 것이라고 말한 까닭입니다. 이처럼 새로운 변화는 진통의 관문을 지나기 마련입니다. 포기해야 할 현실적 편리와 익숙함이 다소 불안과 염려가 되겠지만, 새싹에 움이트기 위해선 진통을 피할 길 없습니다. 대신에 탐욕으로 그늘 진 세상의 풍조에 먹힌 바 되지 않기 위해 꾀와 민첩성을 갖춘 토끼 같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변화되기 위해 겪어야 할 진통은 감내하면서, 토끼처럼 지혜롭게 희망의 결실을 맺어가는 것이지요. 계묘년인 금년 한 해가 여러분 모두에게 삶의 풍성한 열매를 거두기 위해 새싹 위에 또 다른 땀과 눈물을 뿌리는 신앙의 변곡점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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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양칼럼] 1월 2일 2023년 Publish on January 05,2023관리자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를 기다리는 희망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소망 안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소망을 품은 믿음의 사람은 막연하게 새로운 변화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비전을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들이여야 합니다. 이제 막 새해의 발걸음을 내딛는 이 시점에, 소망의 믿음 안에서 우리가 새로운 비전을 실현해 내기 위해 다짐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허무하고 곤고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에 스스로 생기를 불어 넣는 길입니다. 그것도 홀로 서기 위함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서기 위해 희망의 터를 일구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믿음으로 행하며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와 성도 여러분 모두가 이 소망 안에서 함께 소중한 기억을 만들어 가는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 같이 동일한 시간의 여정을 걸어간다는 것은 우연인 것처럼 보이지만,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예측하지 못한 어느 하나의 변수라도 개입된다면, 결코 일어나기 어려운 조합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한 소망 안에서 사이좋게 서로 믿음을 행하며 삶의 한 페이지를 채워 나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만큼 배려와 보살핌이 요구되는 일입니다. 박노해 시인은 <인다라의 구슬>에서, 서로를 향해 다가서기 위해 먼저 선행되어야 할 조건으로 자신의 변화를 다짐한 바 있습니다. 믿음을 행하는 사람의 증거가 삶의 구체적인 변화인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먼저 인사하기/ 내가 먼저 달라지기/ 내가 먼저 정직하기/ 내가 먼저 실행하기/ 내가 먼저 벽 허물기, 내가 먼저 돕고 살기/ 내가 먼저 손 내밀기/ 내가 먼저 연대하기/ 무조건 내가 먼저/ 속아도 내가 먼저, 말없이 내가 먼저/ 끝까지 내가 먼저” 시인의 다짐처럼 새해에도 서로를 위해 믿음으로 내가 먼저 배려와 섬김, 헌신과 사랑을 베푸는 복 된 한 해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올 한 해가 모두의 기억 속에 아름다운 선물로 남을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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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
    [목양칼럼] 12월 26일 2022년 Publish on December 30,2022관리자
    한 걸음씩 내딛다 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왔습니다. 매년 거듭되는 발길이라, 쉬지 않고 반복해서 돌을 언덕 위로 밀어 올려야 했던 시지프스의 형벌처럼 고된 시간으로 기억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쳇 바퀴 같은 일상을 돈다해서 무가치한 건 아닙니다.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제 각각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설렘도 일상에서 벗어난 파격적 일탈 때문이 아닙니다. 일상과 다른 새로움이 아니라, 새롭게 일상을 맞이하는 것 뿐입니다. 일상을 떠난 삶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삶을 살아간다는 건 일상을 소중하게 가꾸며 가는 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한갓지게 일상과 거리를 두고 싶은 마음조차 주어진 매일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법입니다. 그래서 모든 게 다 지나온 시간을 수놓는 아름다운 기억들로 남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한국의 지성인들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과이불개(過而不改)’를 선정했다고 합니다. 논어에 등장하는 말인데,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왕이 간신의 말에 현혹되어 신료들의 시정 권고를 듣지 않은 사례들을 언급할 때도 이 말이 등장합니다. 고집불통의 지도자 밑에서 국가가 안정될 리 없고, 백성들이 평안할 틈이 없는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신학자인 폴 틸리히는 '죄'를 '소외'와 결부 시킨 바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가 멀어진 소외가 곧 죄라는 뜻입니다. 사이가 벌어지니 친밀감은 말할 것도 없고, 홀로 서 있기 조차 버거워 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성버성한 관계 속에서 선한 열매가 맺힐 리 만무하니, 삶이 힘들어 지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일은 삶을 조화롭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사람 사이에 화해를 이루는 것이지요. 그것이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며 가꾸어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샬롬의 세상과 같습니다. 각자의 삶 속에서 자기 수고의 열매를 누릴 뿐만 아니라, 서로를 돌보며 필요를 채워주는 사이좋은 세상입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소박한 행복을 꿈꾸는 것이 사치가 되지 않고, 일상이 주는 평범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새로 맞이하게 될 한 해는 일상의 소중함을 알고, 매 순간 다가오는 하나님의 은혜에 더 많이 감사하며 사는 시간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내년 이 맘 때에는 민틋한 일상을 수놓은 아름다운 기억들로 가득한 한 해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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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양칼럼] 12월 19일 2022년 Publish on December 20,2022관리자
    어둠의 틈새로 빛이 새어 나올 수 있도록 조금씩 찢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라 할것도 없이 그 빛은 절망의 심연에 갇힌 이들에게 길을 여는 희망입니다. 호젓한 기쁨으로 한껏 들뜨게 만드는 화려한 장식과는 차원이 다른 빛입니다. 물론 아련하게 들려오는 캐럴송과 함께 은은한 불빛은 분잡한 생활에 거칠어졌던 마음을 숙지근하게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땅의 어둠을 찢고 빛으로 찾아 온 예수의 탄생은 그저 가볍게 사람의 감성이나 자극하려고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만삭의 여인을 위해 누구도 문을 열어 주지 않던 베들레헴의 비정한 어둠을 찢어 내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무너진 그 틈 사이로 빛이신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오랫동안 어둠에 갇혀 무감각해진 세상에 희망의 빛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 빛을 통해 우리도 어둠을 가르고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시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시야 바깥에 존재하던 벼랑 끝의 사람들이 보이고, 비스듬히 서 있는 나를 받쳐 주기 위해 묵묵히 곁을 지키던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님이 더이상 멀리 서서 관망만 하지 말고, 빛 가운데로 들어오라고 우리를 부르신 까닭입니다. 이제 희망의 빛을 머금지만 말고, 가서 나누어 주라는 것이지요. 척박한 현실 속 어둠에 갇힌 자들, 곧 배고픈 사람과 헐벗은 사람 그리고 병자와 나그네를 돌보며 희망의 빛을 나누어 주라는 말씀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야말로 큰 것에도 충성된 자라는 가르침을 생각해 보면, 작은 나눔 하나에도 대자대비하신 하나님의 큰 뜻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깊어지는 어둠만큼, 희망의 빛을 나누는 작은 돌봄과 보살핌도 소자에게는 큰 위로와 기쁨이 되는 법입니다. 성탄의 축제를 온기가 절실한 시기의 한 가운데 마련한 것도 그런 깊은 뜻이 있었던 이유가 아닐까요? 여전히 찢어내야 할 어둠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모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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