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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삼위일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Publish on February 26,2013 | 홍삼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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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홍삼열
댓글 0건 조회 7,960회 작성일 13-02-26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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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중에 여호와의 증인이 있다. 이들은 정통 기독교인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삼위일체에 대해 질문 하기를 즐기는데, 이들은 기독교가 믿는 삼위일체가 비합리적이고 비성서적이라고 주장한다. “왜 당신들은 성경에도 없는 삼위일체를 믿습니까? 이 교리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사탄이 준 것입니다이렇게 주장한다.<?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사실 여호와의 증인의 지적대로 삼위일체(Trinitas)라는 단어는 성경에 없다. 그러나 이 특정 단어가 없다고 해서 성경에 그 개념도 없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삼위일체를 믿는 것은 비록 성경에 그 단어는 없지만 성경이 그 개념을 가르치기 때문이고, 우리가 이 단어를 사용할 때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관계를 더욱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사실 정통교회가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여호와의 증인 같이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들 때문인 것이다. 만일 성자와 성령을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않는 이단들이 아니었다면 정통교회도 굳이 성경에도 없는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만들어 사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이 삼위일체를 거부하는 주요 근거는 두 가지이다. 우선 그들은 이 개념이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기독교는 유일신을 믿는데 삼위일체는 이 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셋인데 하나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오직 여호와만을 하나님으로 섬겨야 유일신론자가 되는 것이지, 어떻게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예수와 성령도 하나님으로 섬기면서 유일신론을 유지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삼위일체를 믿는 것은 곧 삼신론을 믿는 것이거나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라는 논리이다. 또 정통기독교가 주장하는대로 만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진짜 하나라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자기가 그렇게 간절하게 자기 자신에게 기도했다는 말인데, 이게 논리적으로 모순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둘이 서로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삼위일체는 말이 안 되는 모순이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여호와의 증인이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근거는 이 개념이 성서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들이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성구가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 1:1) 일단 여기에 언급된 말씀이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나 음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의미한다는 것에서는 정통기독교와 여호와의 증인이 이해를 같이 한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 입장이 갈라는 것이 1절에 두 번 나오는 하나님이란 단어에서이다. 여호와의 증인은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에 나오는 하나님을 하나님/전능자”(The God)로 이해하지만, 곧 이어 나오는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의 하나님은 /대능자”(a god)로 이해한다. 어째서 같은 하나님이란 단어를 이렇게 다르게 이해하는 것일까? 헬라어 원문에 보면 이 첫 번째 하나님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고 두 번째 하나님에는 정관사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은 The God/진짜 하나님이고 성자 하나님은 a god/유사 하나님이란 것이다.

이게 사실일까? 첫 번째에는 정관사가 있고 두 번째에는 정관사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 정관사의 유무가 진짜 하나님과 가짜 하나님을 구분하는 증거가 된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요한복음 1:1절 이후에 나오는 6,12,13,18절의 경우를 보면, 성부 하나님을 지칭하면서도 정관사가 없는 하나님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반면에 그들이 /대능자라고 부르는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기록된 성경구절들 중에 정관사가 붙은 경우들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20:28절에서 도마가 예수님을 가리켜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 θες)”라고 했을 때 이 하나님이란 단어에 정관사가 붙어 있다. 디도서 2:13절에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란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부를 때 정관사(The)가 붙어 있다.(그밖에 히 1:8, 요일 5:20, 9:5절을 보라.) 따라서 정관사의 유무를 가지고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것은 설득력이 전혀 없다.

우리는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셋으로 구별되지만 서로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상태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성경을 찾아보면 실제로 이 셋이 서로 구별되는 것으로 설명된 구절들도 나오고 서로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상태로 설명된 구절들도 나온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로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대답하셨다.(마가 10:17-18) 또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성부 하나님을 내 아버지여라고 부르면서 기도하셨다.(마태 26:39) 이로 보건대 성자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은 서로 구분된다. 또한 예수님은 성령을 가리켜 다른 보혜사라고 부르시면서 자신과 성령을 구분하셨다.(요한 14:16)

반면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상태로 표현된 구절들도 많이 있다. 요한복음 10:30절에 보면 예수님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실 때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자칭 하나님이라주장하기 때문인 것이다. 또 요한복음 20:28절에 보면,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내용이 나온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분명히 도마의 말을 교정해주셨을 것이다.(요일 5:20, 9:5를 참조) 또한 성령은 예수의 영(갈라디아 4:6)이요 아버지의 영(고전 3:16)으로 설명되어 있고, 사도행전 5:3-4절에서는 성령을 속인 것이 곧 성부 하나님을 속인 것이 된다고 하면서 성령과 성부를 동의어로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시고(마태 28:19), 바울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복을 한다. 만일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 이름들로 세례를 베풀거나 축도하는 것은 신성모독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다.

삼위일체의 개념이 보통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오게 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시도가 있어왔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이렇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태양의 세 가지 속성에 비유해서 설명하는 방법이 있었다. 태양은 동시에 빛을 비추고 열을 발산하고 붉은 색의 모습을 띤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속성 중 하나가 사라지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 하나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다 없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태양의 빛과 열과 붉은 색이 셋이지만 결국 하나인 것처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하나님이라는 설명이다. 또는 삼위의 관계를 상황/시기에 따라 다른 역할을 한다는 관점에서 설명하는 방법이 있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는 성부로 (특히 창조와 관련하여), 신약시대에는 성자로 (특히 구속과 관련하여), 그 후에는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영원히 내주하시는 주님으로) 나타나셨지만 그 셋은 동일본질이라는 설명이다. 한 하나님이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설명이다. 이에 대한 현대판 설명은, 나는 집에서는 아버지이고 교회에서는 목사이고 학교에서는 선생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하나라는 설명이다.

이렇게 설명하는 방법을 양태론(modalism)으로 부르는데, 한 하나님이 필요에 따라 세 가지 양태(mode)로 나타난다는 이론이다. 이 설명의 강점은 삼위가 하나라는 것을 잘 설명해준다. 반면에 약점은 셋 사이의 구분이 거의 없어진다는 것이다. 사실 이 설명으로는 셋 사이에 이름만의 구별이 있을 뿐이지 실제적인 구별은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이론의 불합리성을 지적하였다. 만일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면,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셨을 때 그때 성부도 돌아가셨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에는 누가 이 우주를 운행하고 계셨단 말인가? 논리가 서지 않는다. 그래서 정통교회는 이런 양태론적 설명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제대로 설명하기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내린 것이다.

양태론이 유일신 하나님을 설명하려다가 너무 지나쳐 삼위의 실제적 구분을 무시하는 오류를 범했는데, 이 이론에서 정반대 극단으로 가서 아예 삼위의 분리를 주장하는 이론이 있었다. 일명 양자론(Adoptionism)이라 하는 이단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 다른 차원의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성자 예수님은 원래는 우리와 똑 같은 피조물인 인간인데, 너무나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좋게 보아서 세례 받으실 때 그를 당신의 특별 양자로 입적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아니라 세례 받으신 후부터 하나님이 되었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물론 이 이론은 너무나 터무니 없기 때문에 손쉽게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는 양태론도 아니고 양자론도 아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하나님의 본질을 유지하면서 그 인격과 사역에 있어서 분명하게 구별이 된다고 믿고 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바이다.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일 뿐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셋이면서 하나인가를 완벽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논리의 허점을 지닌 불완전한 비유를 들어서까지 설명을 시도하는 것인데 양태론적 설명이 이에 속한다. 어쨌든 우리가 가장 안전하게 이 문제에 대해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 이상을 생각하지 말고 그 이상을 가르치지 말자는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요약하면 이렇다. 1) 성경은 한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가르치고 있다. 2)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인격과 사역에 있어서 서로 구분된다. 3) 이 세 인격이 모두 하나님으로 불리고 서로 하나인 것으로 즉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 신비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 바로 삼위일체라는 개념이다. 우리가 성경이 가르치는 정도만 받아들이면 구원받는데 지장이 없다. 완벽하게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이에서 지나는 설명을 시도할 경우 이단으로 빠질 위험이 다분히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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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악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입니까? Publish on January 20,2014홍삼열
    창세기를 읽어보면 하나님이 온 세상만물을 창조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위에 있을 때”(창 1:2) 하나님이 빛을 만드시면서 온 세상을 창조하기 시작하셨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창조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그들에게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맡겨 주셨는데, 이들은 뱀(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쫓겨나게 된다. 이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는 에덴동산에 있는 사탄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된다. 선하신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면 이 악한 사탄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만일 하나님이 선과 함께 악도 만드신 것이라면 하나님은 전적으로 선하신 분이라는 말이 거짓이 된다. 어떻게 선에서 악이 나오는가? 또한 만일 악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라는 말이 거짓이 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안에 하나님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전능성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창조, 아니 하나님의 최선의 창조물인 인간에게도 처음부터 악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애초에 아담과 하와에게 유혹에 넘어갈 만한 “가능성”이 없었다면 아무리 사탄이 유혹을 해도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창조는 불완전한 것이고, 이 불완전하다는 말은 선과 함께 악의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에덴동산에서부터 목격되는 이 악의 존재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악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어떤 다른 세계/존재에게서 나온 것인가? 마니교 같은 이원론(二元論)적 종교는 처음부터 선(하나님)과 악(사탄)이라는 두 가지 원리가 존재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일원론(一元論)적 사고에 기초하여 한 가지 궁극적 원리인 선(하나님)만이 존재하고 악은 허상이라고 가르친다. 기독교적 일원론, 즉 이 세상에는 궁극적으로 선(善)과 악(惡)이라는 두 가지 원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선(하나님)이라는 한 가지 원리만 존재한다는 입장을 가진 신학자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4세기의 성 어거스틴을 들 수 있다.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을 “선의 결핍”(privatio boni)이란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악은 진짜 존재하는 어떤 실체(subatance)가 아니라 실체가 없는 현상(accident)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만일 어떤 사람의 피부에 상처가 생겼다면 이 상처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건강한 피부가 망가진 현상일 뿐이란 설명이다. 즉 실체는 건강한 피부이고 상처는 건강한 피부의 “결핍” 혹은 손상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에게서 병이 낫고 상처가 아문다면 그것은 실체를 가진 상처가 다른 곳으로 이동해 갔기 때문이 아니라 그 “현상”이 없어진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빛과 어두움의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원론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은 원래 세상에는 빛과 어두움이란 두 가지 원리가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빛도 실체이고 어두움도 실체이고 이 둘이 영원히 대립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일원론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은 빛은 실체이지만 어두움은 빛의 결핍을 지칭하는 현상일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사실 현대 물리학에서도 이것을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빛은 소입자로 구성되어 있는 실체이지만, 어두움은 빛의 소입자가 없는 결핍의 상태 혹은 현상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태초에 흑암 가운데서 빛을 만드시며 천지를 창조하실 때, 빛이 있음으로 인해 흑암은 자동적으로 없어지게 된 것이다. 빛의 실체가 생겨남으로써 이미 있던 흑암의 실체가 뒤로 밀려나간 것이 아니라 빛의 결핍 현상이 사라진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악이 바로 그런 것이다. 하나님은 온전한 선이기 때문에 악이 하나님에게서 나올 수가 없다. 단지 악은 선의 결핍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는 상태는 자연히 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악의 실체를 없애려는 시도보다는 선을 제공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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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전의 십자가 사건이 개인적으로 나와 무슨 상관이 있죠? Publish on January 07,2014홍삼열
    부모님들이 어린 자녀와 대화를 하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들을 받는 경우가 있다. 그냥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그런 의문이 있을 수 있겠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질문들이 있다. 어느 목사님이 자녀와 대화를 하다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 “예수님이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하는데 그것이 개인적으로 나와 어떤 연관이 있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알겠는데 꼭 짚어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은 솔직히 마음으로 느껴지지가 않고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와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 설명해줄 수 있습니까?”이것은 예수를 믿기 시작한 분들에게 종종 생겨나는 질문이고 또 신앙생활을 꽤 하신 분들에게도 생길 수 있는 질문이다. 교회에서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2000년전의 사건이 어떻게 현재 나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의문이 계속 남게 된다.이 문제는 기독교 신학에서 그리스도의 대속(代贖)과 대표성(代表性)의 개념으로 설명된다. 우선 대속의 개념을 살펴보자.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이 세상에 자신의 능력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고 오직 죄와 상관 없으신 하나님만이 그 일을 해주셔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방법은 오직 하나,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대신 인류의 죄를 떠맡아 속죄하시는 것이다.비유를 들면 이렇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다고 하자. 어떻게 그 물에서 나올 수 있을까? 수영을 못하기 때문에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물밖으로 나올 수 있을까? 아니면 옆에서 같이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이 그를 구해줄 수 있을까? 둘 다 아니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든 밖에서 생명줄을 던져줄 수 있는 사람이든 어쨌든 자기는 허우적대지 않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출해줄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 죄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오직 죄와 상관이 없으신 하나님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을 통해서? 바로 죄없으신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온 인류의 죄를 대신 담당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온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나에게 어떻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가? 어떻게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속하신 ‘나의’ 구세주이가 되시는가? 로마서 5:12-19절은 첫 아담과 둘째 아담(예수 그리스도)을 비교하여 이렇게 설명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15절)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18절)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은 두번째 아담으로 오셔서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되셨다는 것이다. 즉 원죄를 가진 인류의 조상인 아담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그 자체로 자동 죄인이 되는 것처럼 죄에서 해방된 인류의 조상이신 예수 안에서 거듭난 사람은 자동적으로 구원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대표성의 원리이다.비유를 들자면 이렇다. 어느 가정의 가장이 큰 빚을 졌다고 하자. 그러면 그 사람만 빚을 진 것인가? 그렇지 않다. 비록 자식들은 자기가 직접 빚을 진 적이 없지만 가정의 대표인 아버지 때문에 자동적으로 같이 빚을 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반면에 어느날 아버지가 어디서 돈을 구해서 빚을 다 갚았다면 아버지가 빚을 갚음으로해서 자식들의 빚도 다 갚아지는 것이 되는것이다. 어릴 때 빚문제 때문에 온갖 어려움을 당해본 사람은 이 대표성의 원리가 얼마나 개인에게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는지 실감할 것이다. 우리가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에게 속한다는 것이 이런 실질적인 영향이 있는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아담의 죄”를 짓지는 않았지만 인류의 대표가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나도 죄인이 되는 것처럼, 이제 새로운 인류의 대표가 되신 예수님께 속하게 되면 나는 자동적으로 죄인의 운명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온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은 당연히 ‘나의’ 구세주가 되시고,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은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되는 것이다. 이런 개인적인 성격이 잘 드러나는 것이 로마서 8:1-2절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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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신자는 당연히 운동도 열심히 해야 할까요? Publish on December 24,2013홍삼열
    며칠 있으면 2014년도의 새해가 동튼다. 새해가 되면 누구든지 새로운 결심을 하고 싶어한다. 꼭 해보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해보지 못한 일, 여러 번 시도했지만 실패했던 일을 새해에는 꼭 이루어보고 싶은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다.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주로 영적인 것에 관련하여 새해결심을 한다. 성경을 한 번 통독한다든지 주일성수를 한다든지 아니면 새벽기도를 지속적으로 하는 것 등 지금까지 성공하지 못했던 것이 새해에는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육신과 관련하여 새해계획을 세우는 것은 신앙인에게 별로 덕스럽지 못한 일일까? 특히 육체적으로 건강해지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며 운동한다는 계획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나 적합한 새해계획일까?기독교 전통에는 육체에 대해서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이 존재해왔다. 하나는 육체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영혼을 아래로 끌어내리는 부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에게는 육체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은 곧 사탄을 도와주는 꼴이 된다. 그래서 가능하면 육체의 힘을 빼고 육체의 욕망을 제거하는데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반면에 육체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것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창세기 1장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물질세계와 육체를 창조하시고 반복해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육신이 기본적으로 선한 창조라는 것을 가르치셨다. 단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함으로 인해서 육체에 많은 제약이 생겼을 뿐이다. 즉 육체가 영을 도와주지 못하고 정반대로 영의 활동을 방해하는 일이 많아진 것이다.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육체를 악한 것으로 보아서 신앙인은 육체의 상태를 좋게 만드는 데는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할까? 아니면 육체를 선한 것으로 보아서 더욱 더 건강해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할까?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우리의 육체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이라는 것이다. 단지 우리의 육체 안에 있는 “육체의 소욕”이 문제인 것이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갈 5:17) 우리는 ‘육체’와 ‘육체의 소욕’을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 육체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이기 때문에 더욱더 건강하게 관리하고 가꾸어야 하는 것이고, 육체의 소욕은 사탄적인 것이기 때문에 성령의 힘으로 억제하고 죽여야 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절제’라는 기독교 덕목이 강조된다. 하나님이 선하게 창조해주신 몸을 해칠 정도로 폭식을 하는 것, 과음을 하는 것, 과로를 하는 것 은 육체의 소욕을 좇아 행하는 것으로서 금해야 하는 것이다.하나님이 우리의 육체를 선하게 창조하셨다는 원리는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란 개념과 통한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이 성경구절은 우리 몸을 내 맘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선언이다. 몸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하게 창조해주신 하나님의 집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 목적에 맞게 거룩하게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몸에 해가 되는 담배나 마약을 하거나 무절제하게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되고, 더 나아가 몸을 더욱 건강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운동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신앙인들 중에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잘 못한 까닭일까? 표면적인 현상만을 보고서 판단할 수는 없는 문제이다. 무절제한 생활 때문에 건강이 나빠졌다면 분명히 신앙생활을 잘 못한 것이다. 그러나 유전적인 이유 때문에 혹은 어떤 불가항력적인 이유 때문에 그런 것이라면 부실한 건강과 부실한 신앙을 연결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의 상황이 어떻든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되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다.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으면 이것은 불신앙이다. 자, 그래서 내년에는 운동을 하시겠는가? 좋은 신자라면 당연히 운동도 열심히 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성전의 역할을 잘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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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추도예배를 드려도 되는 겁니까? Publish on December 16,2013홍삼열
    돌아가신 부모님의 기일이 되었을 때 보통 가족과 친지들이 고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함께 모여 고인의 유훈을 되새기며 음식을 나누는 시간을 가진다. 이때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은 대개 제사를 지내고 기독교인들은 제사대신 추모예배 혹은 추도예배를 드린다. 그런데 기독교인들 중에 추모/추도예배를 비성서적인 것으로서 거부하는 분들이 있다. 크게 두 가지 근거에서 거부를 하는데, 하나는 그 용어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런 식으로 함께 모여서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며 애도하는 것이 성서적이지 않다는 것이다.우선 첫 번째 것부터 생각해보자.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보면 추도예배나 추모예배라는 용어 자체가 모순이 된다는 주장이 있다. 왜냐하면 추도(追悼)라는 말은 “죽은 사람을 생각하여 슬퍼한다”는 뜻이고 추모(追慕)라는 말은 “죽은 사람을 사모한다”는 뜻으로 그 대상이 사람인데 반하여, 예배는 그 대상이 오직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즉 돌아가신 분을 그리워하며 사모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추도예배나 추모예배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고 대신 추도식이나 추모식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다.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예배의 형태들, 즉 장례예배, 취임예배, 개업예배, 송별예배 등도 용어 그 자체로 모순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예배”들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만이 대상이 되어야 할 예배의 이름을 거기에 붙일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그런 행사들에는 절대 예배라는 이름을 붙이지 말고 대신 “예식” 혹은 “식”이란 명칭을 붙이는 것이 맞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장례식, 취임식, 개업식, 송별식 등의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원칙적으로는 필자도 이런 주장에 동의한다. 예배는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사람이 중심이 되는 행사에는 예배라는 이름대신 그냥 예식이란 이름을 붙이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그런데 이 논리를 뒤집어보면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만일 고인의 이름으로 치러지는 장례예식이나 추모예식이 실제로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즉 그 예식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고백이 이루어지고, 죽음과 부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 말씀이 어떻게 고인의 삶과 죽음에 그리고 우리의 삶과 죽음에 적용이 되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진다면, 그것이 예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 그 예식이 보통 일반 예배의 형식, 즉 찬양과 기도와 말씀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면, 그것을 굳이 예배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부를 이유가 있을까? 더 나아가 우리가 이런 행사를 예배라고 부르는 이유 중 하나가 우리의 관점을 의도적으로 인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자는 의도가 아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신앙인이라면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목적으로 하고 하나님이 그곳에서 중심이 되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고인을 기억하는 시간을 갖는 것을 예배로 부르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본다.일부 기독교인들이 추모/추도예배를 거부하는 또 다른 근거는 이것이 제사에서 행해지는 우상숭배의 변형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전과 똑같이 제사상을 차려놓고 죽은 혼령이 와서 제사음식을 먹는다고 생각하며 단순히 절만 하지 않고 기독교식의 기도를 한다면 이건 옷만 갈아입은 것이다. 겉모양은 예배지만 실제 내용은 우상숭배인 것이다. 기독교는 절대 예배를 통해 고인에 대한 그리움을 부추기는 일도 없고, 죽은 혼령이 와서 제사음식을 통해 산 사람을 만나주는 “영적 친교”를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음식상을 준비하는 이유가 고인의 혼령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참석하는 분들의 친교를 위해서라면 이건 금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고인을 추모하는 시간을 추모예배가 아닌 추모예식으로 부르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추모예배라는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의도적으로 고인의 혼령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의 중심 대상으로 삼는 것이라면 굳이 “예배”라는 이름과 예배의 행위를 거부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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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인은 지금도 선민입니까? Publish on December 01,2013홍삼열
    기독교인들에게 이스라엘은 특별한 나라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다른 나라들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 이유는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특별히 택하신 민족, 즉 선민(選民)으로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12장 2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그의 고향 친척 땅에서 불러내시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때 아브라함에게 이런 약속을 주셨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그 후에 증손자인 요셉 대에 가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이집트에 들어가 거주하게 되고, 그 후 모세의 시대에 접어들어 그들이 이집트를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때 중간지점인 시내 산에서 이들이 하나님과의 특별한 계약, 즉 선민의 계약을 맺게 된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애굽기 19:5-6) 이제부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해 주신 나라, 제사장 나라, 거룩한 나라가 된 것이다.그러면 이것이 신약 시대에도 그대로 유효할까? 베드로전서 2:9절에 보면 “너희는 [즉 예수 믿는 사람들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이제 이스라엘의 선민의 지위는 사라진 것일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하신 것에는 미래를 향한 분명한 비전이 있었다. 그것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의 모든 민족과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비전이었다. 사실 하나님이 애초에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를 “복” 혹은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이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 만민에게 전달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말씀을 주신 바로 직후에 그 의도를 이렇게 분명히 설명하신 것이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세기 12:3절)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실 때 처음부터 그를 통해 천하만민이 복을 얻게 될 것을 계획하셨다면 선민의 개념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확장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즉 구약시대의 지엽적이고 육적인 차원에서 신약시대의 영적인 차원의 선민의 개념으로 확대되어야 하는 것이다.예수님은 이 진리를 마태복음 8:10절 이하에서 미리 예고하셨다. 로마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앞으로 세계 만방에서 그와 같은 이방인들이 많이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게 되고” 즉 구원받는 백성이 되고, 반면에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즉 구원에서 제외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배척하는 유대인과 예수님을 영접하는 이방인의 위치가 완전히 뒤바뀌어서, 육적 이스라엘 대신 영적 이스라엘이 선민이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렇게 유대인과 이방인의 운명이 역전된 것일까? 바울은 이것이 원래 하나님의 계획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하나님은 원래 예수 믿는 사람들을 선민으로 택하셔서 구원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는데,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숨겨진 섭리에 따라 이것이 감추어져 있다가 신약시대에 밝히 드러나게 되었고,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육적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현재의 육적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선민의 개념이 확대되었을 것인데(선민=육적 이스라엘+영적 이스라엘), 그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선민의 자격을 박탈당하게 된 것이다.(선민=영적 이스라엘)바울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접붙임의 비유를 사용한다.(롬 11장) 이스라엘은 원래 참감람나무이고 이방인은 돌감람나무인데,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영접하지 않음으로 인해 그 원가지가 참감람나무에서 잘려내 버려지고 그 자리에 대신 돌감람나무 가지가 접붙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돌감람나무 가지는 참감람나무의 진액을 받아서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을 통해 돌감람나무가 선민이 된 것이다. 이렇게 신약시대에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음으로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당하면 선민이 되는데, 그렇다면 원래의 이스라엘은 영원히 선민의 지위를 잃어버린 것일까? 과연 현재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일까?한쪽에서는 이스라엘은 메시야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십자가에 사형시켰기 때문에 영원히 선민의 지위를 잃어버린, 가망 없는 민족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다른 쪽에서는 이스라엘이 선민의 지위를 잃어버린 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게 하기 위한 일시적인 현상이었고,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오면 이스라엘이 다시 선민의 지위를 회복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정서를 단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현재 미국 개신교의 친 이스라엘 태도이다. 이스라엘이 주변 나라들과 전쟁을 벌이게 되는 경우 혹은 어떤 외교적 마찰이 있는 경우 대체로 미국의 기독교는 이스라엘을 지원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 마음에는 아직도 이스라엘이 선민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그러면 신약성경에는 우리가 이스라엘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을 가르치는가? 로마서 11:1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하나님이 참감람나무에서 가지를 잘라내 버리시고  돌감람나무 가지를 그곳에 접붙이셨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신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심으로 이스라엘로 “시기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으셨던 것이고, 나중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통해 온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날이 오게 되는데 그때에는 정말 충만한 은혜의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12절) 따라서 유대인이 지금도 선민인가에 대한 대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예수 믿는 영적 이스라엘만이 선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이 구원받은 이방인들같이 영적 이스라엘이 될 때는 그들도 선민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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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에서 영세를 받았는데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하나요? Publish on November 24,2013홍삼열
    얼마 전에 천주교회에 다니던 분이 저희 교회에 오셨는데 자신이 천주교회에서 받았던 영세를 우리 개신교회에서 인정하냐고 물으셨다. 이렇게 물으시는 이유는 자신이 다니던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성공회를 제외한 다른 개신교회의 세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천주교의 공식 입장은 그렇지 않다. 적법하게 세례를 받은 사람에 한해서 개신교회의 세례를 인정해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미국 천주교회는 이 방침을 따른다.) 그러면 무엇이 적법한 세례인가?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의 표시로 세례를 청원한 후 집례자가 물을 사용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으면 그것이 적법한 세례이다. 이 적법성을 증명하려면 세례증명서나 세례 때의 사진 혹은 그때 참석한 사람의 증언을 제출하면 된다.그런데 어떤 이유에서든 신부가 판단하기에 세례가 실제로 이루어졌는지 혹은 그것이 적법하게 시행되었는지에 대해 의구심이 있을 경우 해당자에게 “조건부 세례”를 주게 된다. “당신이 세례를 받을 만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세례를 줍니다.” 이 조건부 세례를 시행하는 취지는 이렇다. 만일 이 사람이 받았다고 하는 세례가 유효할 경우 지금 주는 세례는 무효가 되는 것이고, 그 과거의 세례가 유효한 것이 아닌 경우 지금 받는 세례가 진짜 세례가 되도록 하자는 것이다.감리교회를 포함한 대부분 개신교회의 세례관은 기본적으로 가톨릭교회의 입장과 같다. 신자가 어느 교단에 속했든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회개의 은총을 받는 수단으로서 세례에 임하고, 성직자는 성별된 물을 사용하여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적법한 세례로 인정하여 다시 세례를 주지 않는다. 심지어 정통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경우에도 위에 설명된 적법성의 요건을 갖추면 그대로 인정을 한다. 왜냐하면 원칙적으로 볼 때 세례는 교리적으로 혹은 윤리적으로 완벽할 수 없는 인간/성직자가 주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신 하나님이 그런 불완전한 인간의 도구를 빌어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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