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보기도
Publish on August 18,2019홍삼열
한때 ‘중보기도’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중보기도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중보자로서 기도해주시는 형태인데 어찌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을 중보기도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디모데전서 2:5). 중보자(中保者)는 글자 그대로 ‘중간에서 돕는 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의 중간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주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이런 중보의 사역은 이 세상에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 한 분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중보’라는 단어를 다른 사람에게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이다.
그러면 남을 위한 기도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어떤 사람은 이 기도를 그냥 “남을 위한 기도”라고 하든지 아니면 디모데전서 2장 1절에 나오는 “도고”(禱告)로 불러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런데 이 “도고”(ἐντεύξεις)라는 단어는 개역성경에서만 딱 한 번 사용되고 있고 다른 성경번역본들에서는 다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새번역은 이것을 “중보기도”로, 공동번역은 “간청”으로 번역하고 있고, 대부분의 영어성경은 이것을 intercession(중재)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만큼 도고라는 단어는 아주 생소하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고 한국어사전에도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도고로 번역한 그리스어 enteukseis의 의미는 단순히 “기도”이지 “누군가를 위한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남을 위한 기도를 도고로 부르는 것도 무리가 있다. 그래서 “남을 위한 기도”라는 긴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한 현재로서는 그것을 대체할 적당한 용어가 없기 때문에 그냥 현재와 같이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우리가 그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예수님처럼 중보자로 기도한다는 의미는 아니고, 단지 부차적인 의미 혹은 비유적인 의미에서 남을 위해 하나님께 대신 간청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2장 1~2절에 보면 우리에게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면서 특별히 정치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정치 지도자가 잘못된 선택을 할 때, 특히 의도적으로 악한 일을 할 때는 백성이 얼마나 큰 비극을 당하는지 우리는 과거 역사를 통해 반복해서 경험한다. 히틀러가 독일정치를 장악하고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절대화하는 정책을 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유럽에 사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고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크메르 루즈가 캄보디아를 장악했을 때도 역시 엄청난 집단학살이 이루어졌다. 이때 전체 캄보디아 인구의 25%가 죽었다. 그 정도가 아니더라도 어느 나라이든 정치 지도자가 올바르지 못한 동기를 가지고 정치를 하면 온 나라가 고통을 당하게 되어 있다.
그러면 그런 악한 지도자 밑에서 고통당하는 백성은 죄가 없는 것일까? 백성들은 선한데 정치 지도자들만 악하기 때문에 나라가 어려워지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백성도 악의 일부이다. 동반 책임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정치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는 올바른 방법으로 기도해야 한다. 나는 그들의 죄악에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그들이 범하는 죄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며 기도해야 한다. 즉 죄를 짓는 “그들”만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포함한 “우리”의 문제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보기도의 본질이다. 중보기도는 기본적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그들의 죄에 대해 기도할 때도 나를 포함한 “우리의” 죄를 보면서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웃의 죄 때문에 혹은 정치 지도자의 죄 때문에 우리가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그들의 죄 안에서 나 자신의 죄를 보며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느헤미야의 기도는 중보기도의 좋은 예가 된다.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할 때 “그들”이 죄를 지었다고 하면서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 “우리”가 잘못했으니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했다.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느헤미야 1:6-7).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음행하는 현장에서 붙잡혀온 여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남자들이 그녀를 잡아다가 예수님 앞에 던져놓았다. 그때 예수님이 그 남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나?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들어 치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에는 그냥 “죄 없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지만, 그 말을 듣는 남자들은 간음의 죄가 전혀 없는 사람, 행동의 차원뿐만 아니라 마음의 차원에서도 간음의 죄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들어서 치라는 말로 들었을 것이다. 간음의 죄, 과연 그 여인만의 문제일까? 그 여인만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돌을 들어 칠 수 있다. 그러나 나도 어느 정도 그 죄에 동참하고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분명히 그녀의 행위는 죄라고 지적할 수 있어도 돌을 들어서 그녀를 죽일 수는 없다.
누가복음 13장 1절 이하에 보면 타인의 죄 때문에 살해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리고 있었는데 빌라도가 그들을 죽여서 그들의 피가 제물에 섞이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또 누군가가 실로암 망대를 건축했을 텐데 그것이 부실공사였는지 갑자기 그 망대가 무너져서 그 밑에 있던 18명의 사람들이 치어 죽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그렇게 죽은 사람들의 몰락을 보면서 나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죄인이어서 죽었고 나는 죄인이 아니어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도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이고, 그랬다면 나는 죽고 그들은 살아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어떤 악행을 보고 그 악행으로 인한 재난을 볼 때, 무조건 남들을 향해 정죄의 손가락질을 하기 이전에 먼저 나 자신의 죄를 보며 회개할 줄 알아야 한다. 그들의 몰락을 볼 때 그들만 큰 죄를 지어서 그랬다고 몰아가지 말고, 오히려 나도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그렇게 몰락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누가복음 13:4-5). 어떻게 하면 망한다고 하였나? 그들은 죄인이고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 그래서 그들에게 손가락질만 하고 나는 그들의 죄에 전혀 동참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며 회개하지 않을 때 나도 망한다고 하였다. 사실 그들의 경우는 죄가 발각된 것이고 나의 죄는 아직 발각되지 않았을 뿐인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 우리는 내가 정죄하는 그 죄가 내 안에도 있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고, 그 내적인 죄가 악한 행위로 발전하지 않도록 스스로의 모습을 정직히 보고 회개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하여 중보기도를 할 때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나를 포함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중보기도의 형태이다. 그래야 중보기도를 통해 그들도 살리고 우리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복 받기를 원하신다. 개인적으로도 복 받고 가정에서도 복 받고 회사에서도 복 받고 국가적으로도 복 받기를 원하신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회개기도를 해야 하고 중보기도를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죄를 볼 때 정죄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 안에서 나의 죄를 보며 함께 회개 기도하는 정직성이 필요하다. 특히 국가적으로 우리는 정치 지도자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해야 한다. 나라가 평안할 때도 기도해야 하지만, 그들의 악행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할 때, 나 자신을 그들의 악의 일부로 보며 기도해야 한다. “그들”을 향한 정죄의 기도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회개와 중보의 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나라를 회복시키시고 지켜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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