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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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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사만사천의 의미 Publish on July 08,2020홍삼열
    이단은 십사만사천을 자기들 유리한 대로 해석해서 무지한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고 착취한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십사만사천이 무슨 뜻인가?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십사만사천명이 하나님의 인을 받고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들은 두루마리에 달린 일곱 번째 인(sphragis)이 떼질 때 얼마나 엄청난 재앙이 내릴 것인가를 지금 기대하고 있는데, 요한은 지금 그런 사람들에게 구원받는 신자의 이마에 찍는 인(sphragis)에 대해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요한이 해주는 이야기는 계속 인(sphragis)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편지의 인과는 다른 종류의 인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다. 우선 7장 1절에 보면 네 천사가 땅의 사방의 바람을 잠간 붙잡아 둔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속한 십사만사천명이 인을 받기까지 시간을 주기 위해서이다.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7:3). 이마에 인을 치는 이야기는 에스겔 9장 4~6절에 등장한다.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에스겔에게 명령하시는데 예루살렘 성읍에서 일어나는 온갖 종류의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는 참 신자들의 이마에 표시를 하고, 그 표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을 다 죽이라는 것이다.   십사만사천명의 이마에 인을 치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인을 치라는 것은 누구에게 속했는지를 분명히 하라는 말이다. 왕이 자신의 편지에 인을 치면 그 편지가 왕의 권위를 가지는 것처럼, 또 노예나 짐승에게 불도장을 찍으면 누가 그들을 소유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처럼, 사람의 머리에 인을 치는 것은 그 사람이 누구에게 속했는가를 밝히는 중요한 행위이다. 하나님의 인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해서 구원받게 되고, 사탄의 인을 받는 사람은 사탄에게 속해서 멸망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인을 영적인 인, 마음에 새겨지는 구원의 확신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아니면, 기독교 전통에서 구원의 표시로 인정하는 세례로 생각할 수도 있다. 초대교회에서 세례식을 행할 때 세례 받는 사람의 이마에 십자가 사인을 긋는데 여기서 말하는 인을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다.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십자가 사인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의미이다.   이단은 십사만사천을 영적인 의미로, 즉 구원받는 사람들의 완전수(12x12x1000)로 받아들이지 않고 실제 숫자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숫자를 채우기 위해 신도들을 강제하고 착취한다. 물론, 그렇게 하다가 그 숫자에 가까워지면 어느 순간엔가 그것을 영적인 의미로 바꾸어서 사용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십사만사천을 영적 의미로 받아들어야 하는 근거가 여럿 있다.   우선 계시록에서 십사만사천은 완전을 의미하는 상징어이다. 완전수인 12와 다른 완전수인 10의 배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녀로 삼아주신 사람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완전하게 모두 구원해주신다는 뜻이다.   또 12지파에서 12000명씩 뽑아서 인을 친다고 했는데 여기에 나오는 12지파는 실제로 이스라엘의 12지파가 아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12지파에서는 단이 빠지고 (유대 전승에서는 단지파에서 가룟유다와 적그리스도가 나온다고 믿었다) 레위가 들어가고 에브라임대신에 요셉이 들어간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 리스트에 유다가 제일 먼저 등장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유다지파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계시록에서 실제 야곱의 12아들이나 실제 12지파의 이름과는 다른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는가? 영적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또한 7장 9~10절에 보면 하나님의 인을 받은 십사만사천을 가리켜 “셀 수 없는 큰 무리”로 지칭하고 있다. 십사만사천은 구원받는 사람들의 완전수인 것이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의 인을 받고 구원받는 사람들이 천국에서 어떤 위로를 받는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7: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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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증인/감람나무의 의미 Publish on July 08,2020홍삼열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성전 측량과 두 증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1절에 보면 요한은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 명령이 의미하는 것은 가시적인 예루살렘 성전을 측량하라는 것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교회 즉 믿는 자의 무리를 측량하라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성도를 성전으로 설명한 것 같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성전”도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2절에 보면 왜 하나님의 백성들을 측량해야 하는지 목적이 나온다.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하나님의 백성을 측량하는 이유는 그 범주에 들지 않는 “바깥”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시지만,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방인들에 의해 42개월 동안 짓밟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42개월의 기간이 나오는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말 문자적으로 42개월이라는 의미인가? 그렇지 않다. 계시록에 나오는 모든 숫자는 상징성이 있다. 42개월은 3년 6개월이고 1260일이고 7년의 절반이다. 7년이 완전수라면 3년 6개월은 무엇인가? 불완전수이다. 사람들이 3년 6개월 동안 고난 가운데 있다는 말은 그 고난이 영원하지 않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일정기간 제한된 기간 동안만 진행된다는 뜻이다.   3절에 보면 이 제한된 기간에 두 증인이 베옷을 입고 예언한다고 하는데, 왜 두 증인인가? 증인이 둘이라는 말은 무슨 상징성이 있는가? 그들이 증언하는 말이 온전하고 확실하다는 뜻이다.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마태 18:16). 그러면 왜 그 두 증인이 베옷을 입고 있는가?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심판과 회개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또 왜 1260일 즉 일정 기간 동안만 예언하는가? 사람들이 증인들의 증언을 듣고 예수 믿을 기회는 영원한 것이 아니고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다음 살펴볼 것이 11:4절에 나오는 “두 감람나무”라는 표현이다. 두 증인이 두 감람나무라고 하였는데, 이 두 증인/감람나무가 누구인가? 이단은 자기들의 교주가 그 감람나무라고 주장한다. 이단은 성경에 무지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런 거짓말을 하는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계시록의 중심 이미지들은 모두 구약성경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두 감람나무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스가랴 4장에 보면 두 감람나무 이야기가 나오는데,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계시록에서 어떤 이미지를 사용할 때 해당 이미지만을 사용하지 그 이미지가 배경으로 하는 “역사적” 의미까지 모두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계시록의 두 감람나무는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표방하는 가치, 즉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선지자적 사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시각으로 6절을 보면 여기서 말하는 사람이 모세(율법)와 엘리야(선지자)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하늘을 닫아 비가 오지 못하게 한 사람은 엘리야이다. 물을 피로 변하고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친 사람은 모세이다. 그러나 이 경우 역시 역사적 모세와 엘리야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이 표방하는 가치,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두 사람을 각각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은 베드로와 바울, 혹은 야고보와 요한을 의미한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정확히 어떤 것이 맞는지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 두 증인/감람나무가 개인이라기보다는 교회의 예언자 역할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두 증인이 두 촛대라고 하는데, 계시록에서 촛대는 교회를 상징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내용을 잘 생각해보면 두 증인/감람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교회/성도의 순교와 부활에 대한 이야기란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이 나중에 어떻게 되는가?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짐승에게 살해당하고 사흘 반 동안 무덤에 장사되지 못하고 거리에 버려진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들어가서 다시 살아난다. 결국, 하나님의 교회는 순교당해도 다시 살아난다는 승리의 메시지가 아니겠는가? 교회는 “사흘 반” 동안(삼년 반과 같은 의미) 즉 일정 기간 동안 박해의 상황에 처하고, 더 나아가 순교 당하기까지 하지만, 결국에는 부활하여 승리자가 된다는 희망의 메시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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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바른 열심을 가집시다 Publish on July 08,2020홍삼열
    라오디게아교회는 초대교회 일곱 교회 중 유일하게 책망만 들은 교회이다.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신앙이 미지근하다는 것이 문제이다. 신앙생활은 미지근하면 안 된다. 열심히 해야 한다. 나는 지금까지 게으른 사람이 좋은 신앙을 가지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신앙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반드시 열심을 내야 좋아진다. 많은 사람이 오해한다. 예수 믿고 교회 다니기 시작하면 큰 노력 없이도 믿음이 자란다고 오해한다. 그런데 그건 철저한 착각이다. 열심을 내지 않으면 절대 믿음은 자라지 않는다.   열심을 내지 않고 대충 신앙생활 하는 사람에 대해 예수님은 이런 경고의 말씀을 하셨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요한계시록 3:16). “그래도 믿음이 뜨듯 미지근하단 말은 아직 어느 정도 믿음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아직 열기가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어쨌든 천국에 가는 것 아닌가요?” 그렇지 않다. 주님께서 라오디게아교회에게 주신 말씀을 보면, 그런 사람은 예수님이 입에서 토해내신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받아주실 수 없어서 토해내는 사람, 그런 사람이 과연 믿음이 있다고 해야 할까? 그런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해야 할까?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신앙생활에서 열심은 좀 유별난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필수사항이다. 사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열심을 내야 성공할 수 있다. 학생은 열심히 공부해야 학문에 성공할 수 있다. 사업하는 분은 당연히 자기의 분야에서 열심을 내야 성공한다. 스포츠 선수도 땀 흘리는 열심을 내야 성공한다. 하물며,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영생이 걸려 있는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열심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대충 살았는데 20년 지나고 보니까 신앙이 1등급이 되는 사람은 절대 없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절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정말로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넘치는 은혜로 채워 주시면 우리가 1등급 신앙인이 되는 것이다.    열심이 있다고 해서 다 신앙생활에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열심을 내되 올바른 열심을 낼 때 신앙생활에 성공한다. 사실, 잘못된 열심은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하고 죽인다. 자신도 그것 때문에 죽는다. “그들이 [이단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갈라디아서 4:17~18) 여기에 좋은 열심과 나쁜 열심을 대비하고 있다. 갈라디아의 교인들은 처음에 좋은 열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중간에 이단이 들어와서 나쁜 일에 열심 내도록 유혹했다는 것이다. 열심히만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는 신앙에 대한 열심을 볼 때 이것이 올바른 열심인지 잘못된 열심인지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것을 잘 분별하지 못하면 겉으로는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낸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하나님 나라를 무너뜨리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참된 기독교적 열심과 가짜 사이비 열심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어떤 기준으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가? 첫 번째 기준은 사랑이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서 일을 정말 열심히 하는데 그 이유가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서라면 이건 아무리 예쁘게 포장해도 기독교적 열심이 아니다. 그런 잘못된 동기로 열심을 내면 교회를 세우기는커녕 허물게 된다. 또 어떤 사람은 시기심 때문에 열심을 낸다. “나는 저 사람이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너무나 싫어. 자존심 상해서 안 되겠어. 나도 맞불을 놔야지. 나는 그와 반대로 이것을 열심히 해야지.” 이런 식으로 열심을 낸다면 이것도 역시 기독교적 열심이 아니다. 단순히 인간적인 열심일 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열심을 내면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망가진다. 우리는 열심의 근본 동기가 무엇인지 잘 살펴야 한다. 사랑의 동기가 아닌 다른 동기로 열심 내는 것은 하나님께 죄 짓는 것이다.   올바른 열심과 잘못된 열심을 구분하는 두 번째 기준은 인내이다. 올바른 열심이 있는 사람은 인내할 줄 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겉으로 보면 정말 주님을 위해서 열심을 내는 것 같은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불평하는 사람, 더 나아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분노를 일으키는 사람은 기독교적 열심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기다리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스데반의 경우, 열심히 복음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을 때 마음속에 불만을 가득 품고 죽었나? 분노하면서 죽었나? 아니다. 그는 주님의 영광을 보면서 하늘의 평안을 가지고 죽었다. 마음에 불만이 하나도 없이 오히려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까지 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을 위해 열심이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진정으로 기독교적 열심이 있는 사람은 불만이 없다. 초조함이 없다. 언제나 감사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나보다 현명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하는 가장 좋은 때는 언제나 하나님이 아시고 그에 따라 결정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충분히 기다리며 인내할 수 있다. 인내하는 열심이 진정한 열심이다.   그다음 올바른 열심과 잘못된 열심을 구분하는 기준은 겸손이다. 어떤 사람이 주님을 위해 열심이 있다고 하는데 그 열심 안에 겸손이 없다면 그 열심은 가짜다. 열심히 일은 하는데 꼭 자기 자랑을 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 또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을 가망성이 없는 일은 아예 안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은 기독교적 열심과는 상관없는 사람이다. 또 일은 열심히 하는데 자기가 최고라는 우월감에 사로잡혀서 꼭 남을 가르치려 하고 남에게 지시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역시 기독교적 열심과는 상관없는 사람이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교만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일을 열심히 할수록 하나님의 일은 망가지고 하나님의 교회는 무너진다. 올바른 열심을 통해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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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의인이 죄인과 함께 벌을 받아야 하나요? Publish on August 18,2019홍삼열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서로 상반되는 듯한 구절들이 등장한다. 한쪽에서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심판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다른 쪽에서는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무고한 사람도 심판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에스겔서를 보면 몇 장 사이를 두고 위의 두 가지 상반된 내용이 함께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에스겔 18장 19~20절을 보자. 각자가 자신에게 합당한 상벌을 받도록 해야지 남의 것을 대신 받게 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고 있다. “아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반드시 살려니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반면에, 에스겔 21장 3~4절을 보면 악인의 죄 때문에 의인도 함께 심판 받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땅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대적하여 내 칼을 칼집에서 빼어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지라 내가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 터이므로 내 칼을 칼집에서 빼어 모든 육체를 남에서 북까지 치리니.” 이 구절을 읽을 때 우리에게 이런 의문이 생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심판하실 때 악인만 심판하시면 되지 왜 악인과 함께 의인도 심판하신다고 하는가? 의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 주셔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런 식으로 무차별적으로 악인과 의인을 함께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는 해당 구절이 배경으로 하고 있는 특정 상황을 살피는 데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위의 두 구절은 분명히 서로 상충되는 내용이다. 서로 정반대의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각 구절이 배경으로 하는 특정 상황을 알고 나면 그 구절들이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첫 번째 경우부터 살펴보자. 사람이 각자 자신이 행한 데 따라 상벌을 받게 해야지 남의 것을 대신 받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형사법정을 배경으로 하는 말이다. 가령, 법정에서 재판관이 어떤 범죄에 대해 형벌을 내릴 때, 형벌을 받아야 하는 아버지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해서 아들이나 딸을 대신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명기 24장 16절도 동일한 법정의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두 번째 경우는 다른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의인이 악인과 함께 칼의 심판을 받는다는 내용은 개인사에 관계하는 형사법정의 상황이 아니라, 민족 전체에 관계하는 공동 운명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여호수아 7장에 나오는 아간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아간은 여리고와의 전투에서 얻게 될 모든 전리품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명령을 어기고 값나가는 물건을 따로 떼어서 몰래 감추어 두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이 그다음 이어지는 아이성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패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왜 그러셨을까? 아간만 처벌하시면 되는 것을 왜 온 이스라엘을 처벌하신 것일까? 그 이유는 아간의 범죄는 그 사람 혼자만의 범죄가 아니라 온 이스라엘의 범죄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범죄가 가지는 사회적 파장성을 여호수아 7장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7:1).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7:11).   여기에 범죄의 주체로 아간이라는 개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들” 혹은 “이스라엘”을 언급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명령하신 내용은 아간 개인에게 주신 명령이 아니라 이스라엘 모두에게 주신 명령이다. 여리고는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것이기 때문에 백성 중 어느 누구도 전쟁을 통해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사사로이 취하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것이 되어서 신성모독의 죄를 짓는 것이 되고, 이에 대해 당연히 엄중한 처벌이 내리게 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간의 범죄는 개인에게 주신 명령을 어긴 것이 아니라 전쟁의 상황에서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주신 명령을 어긴 것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아이성 사람들과 전투하기 전에 아간의 범죄를 발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형사법정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아간에게만 엄중한 형벌이 내렸을 것이다. 전체 공동체에는 큰 악영향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아간의 범죄에 대해 모르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아이성 사람들과 전쟁을 하게 되고, 이때 참패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항의할 수 있다. 왜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간의 죄를 밝히셔서 그 사람만 죽게 하지 않으셨는가? 다른 사람들이 아간의 범죄를 모르는 상태에서 전쟁을 시작했다가 패배 당하는 것은 너무 부당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엄격히 따져서 그것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신경 써야 할 문제이지 하나님이 신경 쓰실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신 것을 가지고 항의하면 안 된다. 사람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공동체가 함께 대응해야 하는 문제이다. 전쟁이 벌어질 때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동체만이 존재한다. 전쟁에서 사람이 죽을 때 악인만 죽지 않는다. 악인과 의인이 무차별적으로 함께 죽는다. 이것이 현실이다. 여호수아 7장과 에스겔 21장은 의인과 악인이 함께 죽는 공동체적 현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왜 그런 전쟁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의인을 따로 보호하고 살려 주시지 않느냐고 불평하면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 공평한 요구가 아니다. 우리는 공동 책임 혹은 공동 운명에 대해 우리에게 유리한 것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한 사람이 죄를 지어서 그가 속한 전체 공동체가 함께 벌을 받을 때 우리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항의한다. 그러나 정반대의 상황에서는 침묵한다. 한 사람의 특별한 순종으로 그가 속한 공동체 전체가 큰 복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불공평하다고 항의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서,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이 복을 받고 더 나아가 세상의 많은 민족이 복을 받게 되었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항의하지 않는다.   형사법정의 경우같이 사람이 관여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의인과 죄인이 서로 상벌을 공유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의인은 상을 받고 죄인은 벌을 받게 해야 한다. 그러나 전쟁의 상황같이 사람이 개인사에 개별적으로 관여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의인과 죄인이 서로 상벌을 공유하는 것이 현실이다. 경우에 따라서 죄인이 의인에게 주어질 상을 받기도 하고 의인이 죄인에게 주어질 벌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개인 영혼의 구원은 공동체의 운명과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영원한 법정에서는 개인이 행한 것에 대해서 자신만이 책임을 진다. 비록 육신적으로는 부당하게 고난 받고 무고한 죽음을 당할 지라도,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내가 지옥 가지 않고 다른 사람의 선행 때문에 내가 천국 가지 않는다. 의인과 죄인이 함께 벌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법정을 배경으로 하는 당위이고 의인과 죄인이 함께 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인간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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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보기도 Publish on August 18,2019홍삼열
    한때 ‘중보기도’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중보기도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중보자로서 기도해주시는 형태인데 어찌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을 중보기도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디모데전서 2:5). 중보자(中保者)는 글자 그대로 ‘중간에서 돕는 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의 중간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주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이런 중보의 사역은 이 세상에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 한 분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중보’라는 단어를 다른 사람에게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이다.   그러면 남을 위한 기도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어떤 사람은 이 기도를 그냥 “남을 위한 기도”라고 하든지 아니면 디모데전서 2장 1절에 나오는 “도고”(禱告)로 불러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런데 이 “도고”(ἐντεύξεις)라는 단어는 개역성경에서만 딱 한 번 사용되고 있고 다른 성경번역본들에서는 다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새번역은 이것을 “중보기도”로, 공동번역은 “간청”으로 번역하고 있고, 대부분의 영어성경은 이것을 intercession(중재)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만큼 도고라는 단어는 아주 생소하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고 한국어사전에도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도고로 번역한 그리스어 enteukseis의 의미는 단순히 “기도”이지 “누군가를 위한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남을 위한 기도를 도고로 부르는 것도 무리가 있다. 그래서 “남을 위한 기도”라는 긴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한 현재로서는 그것을 대체할 적당한 용어가 없기 때문에 그냥 현재와 같이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우리가 그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예수님처럼 중보자로 기도한다는 의미는 아니고, 단지 부차적인 의미 혹은 비유적인 의미에서 남을 위해 하나님께 대신 간청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2장 1~2절에 보면 우리에게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면서 특별히 정치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정치 지도자가 잘못된 선택을 할 때, 특히 의도적으로 악한 일을 할 때는 백성이 얼마나 큰 비극을 당하는지 우리는 과거 역사를 통해 반복해서 경험한다. 히틀러가 독일정치를 장악하고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절대화하는 정책을 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유럽에 사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고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크메르 루즈가 캄보디아를 장악했을 때도 역시 엄청난 집단학살이 이루어졌다. 이때 전체 캄보디아 인구의 25%가 죽었다. 그 정도가 아니더라도 어느 나라이든 정치 지도자가 올바르지 못한 동기를 가지고 정치를 하면 온 나라가 고통을 당하게 되어 있다.   그러면 그런 악한 지도자 밑에서 고통당하는 백성은 죄가 없는 것일까? 백성들은 선한데 정치 지도자들만 악하기 때문에 나라가 어려워지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백성도 악의 일부이다. 동반 책임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정치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는 올바른 방법으로 기도해야 한다. 나는 그들의 죄악에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그들이 범하는 죄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며 기도해야 한다. 즉 죄를 짓는 “그들”만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포함한 “우리”의 문제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보기도의 본질이다. 중보기도는 기본적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그들의 죄에 대해 기도할 때도 나를 포함한 “우리의” 죄를 보면서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웃의 죄 때문에 혹은 정치 지도자의 죄 때문에 우리가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그들의 죄 안에서 나 자신의 죄를 보며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느헤미야의 기도는 중보기도의 좋은 예가 된다.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할 때 “그들”이 죄를 지었다고 하면서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 “우리”가 잘못했으니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했다.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느헤미야 1:6-7).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음행하는 현장에서 붙잡혀온 여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남자들이 그녀를 잡아다가 예수님 앞에 던져놓았다. 그때 예수님이 그 남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나?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들어 치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에는 그냥 “죄 없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지만, 그 말을 듣는 남자들은 간음의 죄가 전혀 없는 사람, 행동의 차원뿐만 아니라 마음의 차원에서도 간음의 죄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들어서 치라는 말로 들었을 것이다. 간음의 죄, 과연 그 여인만의 문제일까? 그 여인만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돌을 들어 칠 수 있다. 그러나 나도 어느 정도 그 죄에 동참하고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분명히 그녀의 행위는 죄라고 지적할 수 있어도 돌을 들어서 그녀를 죽일 수는 없다.   누가복음 13장 1절 이하에 보면 타인의 죄 때문에 살해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리고 있었는데 빌라도가 그들을 죽여서 그들의 피가 제물에 섞이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또 누군가가 실로암 망대를 건축했을 텐데 그것이 부실공사였는지 갑자기 그 망대가 무너져서 그 밑에 있던 18명의 사람들이 치어 죽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그렇게 죽은 사람들의 몰락을 보면서 나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죄인이어서 죽었고 나는 죄인이 아니어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도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이고, 그랬다면 나는 죽고 그들은 살아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어떤 악행을 보고 그 악행으로 인한 재난을 볼 때, 무조건 남들을 향해 정죄의 손가락질을 하기 이전에 먼저 나 자신의 죄를 보며 회개할 줄 알아야 한다. 그들의 몰락을 볼 때 그들만 큰 죄를 지어서 그랬다고 몰아가지 말고, 오히려 나도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그렇게 몰락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누가복음 13:4-5). 어떻게 하면 망한다고 하였나? 그들은 죄인이고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 그래서 그들에게 손가락질만 하고 나는 그들의 죄에 전혀 동참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며 회개하지 않을 때 나도 망한다고 하였다. 사실 그들의 경우는 죄가 발각된 것이고 나의 죄는 아직 발각되지 않았을 뿐인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 우리는 내가 정죄하는 그 죄가 내 안에도 있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고, 그 내적인 죄가 악한 행위로 발전하지 않도록 스스로의 모습을 정직히 보고 회개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하여 중보기도를 할 때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나를 포함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중보기도의 형태이다. 그래야 중보기도를 통해 그들도 살리고 우리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복 받기를 원하신다. 개인적으로도 복 받고 가정에서도 복 받고 회사에서도 복 받고 국가적으로도 복 받기를 원하신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회개기도를 해야 하고 중보기도를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죄를 볼 때 정죄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 안에서 나의 죄를 보며 함께 회개 기도하는 정직성이 필요하다. 특히 국가적으로 우리는 정치 지도자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해야 한다. 나라가 평안할 때도 기도해야 하지만, 그들의 악행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할 때, 나 자신을 그들의 악의 일부로 보며 기도해야 한다. “그들”을 향한 정죄의 기도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회개와 중보의 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나라를 회복시키시고 지켜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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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의인이 죄인과 함께 벌을 받아야 하나요? Publish on June 12,2019홍삼열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서로 상반되는 듯한 구절들이 등장한다. 한쪽에서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심판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다른 쪽에서는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무고한 사람도 심판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에스겔서를 보면 몇 장 사이를 두고 위의 두 가지 상반된 내용이 함께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에스겔 18장 19~20절을 보자. 각자가 자신에게 합당한 상벌을 받도록 해야지 남의 것을 대신 받게 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고 있다. “아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반드시 살려니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반면에, 에스겔 21장 3~4절을 보면 악인의 죄 때문에 의인도 함께 심판 받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땅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대적하여 내 칼을 칼집에서 빼어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지라 내가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 터이므로 내 칼을 칼집에서 빼어 모든 육체를 남에서 북까지 치리니.” 이 구절을 읽을 때 우리에게 이런 의문이 생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심판하실 때 악인만 심판하시면 되지 왜 악인과 함께 의인도 심판하신다고 하는가? 의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 주셔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런 식으로 무차별적으로 악인과 의인을 함께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는 해당 구절이 배경으로 하고 있는 특정 상황을 살피는 데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위의 두 구절은 분명히 서로 상충되는 내용이다. 서로 정반대의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각 구절이 배경으로 하는 특정 상황을 알고 나면 그 구절들이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첫 번째 경우부터 살펴보자. 사람이 각자 자신이 행한 데 따라 상벌을 받게 해야지 남의 것을 대신 받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형사법정을 배경으로 하는 말이다. 가령, 법정에서 재판관이 어떤 범죄에 대해 형벌을 내릴 때, 형벌을 받아야 하는 아버지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해서 아들이나 딸을 대신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명기 24장 16절도 동일한 법정의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두 번째 경우는 다른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의인이 악인과 함께 칼의 심판을 받는다는 내용은 개인사에 관계하는 형사법정의 상황이 아니라, 민족 전체에 관계하는 공동 운명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여호수아 7장에 나오는 아간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아간은 여리고와의 전투에서 얻게 될 모든 전리품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명령을 어기고 값나가는 물건을 따로 떼어서 몰래 감추어 두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이 그다음 이어지는 아이성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패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왜 그러셨을까? 아간만 처벌하시면 되는 것을 왜 온 이스라엘을 처벌하신 것일까? 그 이유는 아간의 범죄는 그 사람 혼자만의 범죄가 아니라 온 이스라엘의 범죄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범죄가 가지는 사회적 파장성을 여호수아 7장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7:1).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7:11).   여기에 범죄의 주체로 아간이라는 개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들” 혹은 “이스라엘”을 언급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명령하신 내용은 아간 개인에게 주신 명령이 아니라 이스라엘 모두에게 주신 명령이다. 여리고는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것이기 때문에 백성 중 어느 누구도 전쟁을 통해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사사로이 취하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것이 되어서 신성모독의 죄를 짓는 것이 되고, 이에 대해 당연히 엄중한 처벌이 내리게 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간의 범죄는 개인에게 주신 명령을 어긴 것이 아니라 전쟁의 상황에서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주신 명령을 어긴 것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아이성 사람들과 전투하기 전에 아간의 범죄를 발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형사법정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아간에게만 엄중한 형벌이 내렸을 것이다. 전체 공동체에는 큰 악영향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아간의 범죄에 대해 모르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아이성 사람들과 전쟁을 하게 되고, 이때 참패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항의할 수 있다. 왜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간의 죄를 밝히셔서 그 사람만 죽게 하지 않으셨는가? 다른 사람들이 아간의 범죄를 모르는 상태에서 전쟁을 시작했다가 패배 당하는 것은 너무 부당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엄격히 따져서 그것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신경 써야 할 문제이지 하나님이 신경 쓰실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신 것을 가지고 항의하면 안 된다. 사람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공동체가 함께 대응해야 하는 문제이다. 전쟁이 벌어질 때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동체만이 존재한다. 전쟁에서 사람이 죽을 때 악인만 죽지 않는다. 악인과 의인이 무차별적으로 함께 죽는다. 이것이 현실이다. 여호수아 7장과 에스겔 21장은 의인과 악인이 함께 죽는 공동체적 현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왜 그런 전쟁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의인을 따로 보호하고 살려 주시지 않느냐고 불평하면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 공평한 요구가 아니다. 우리는 공동 책임 혹은 공동 운명에 대해 우리에게 유리한 것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한 사람이 죄를 지어서 그가 속한 전체 공동체가 함께 벌을 받을 때 우리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항의한다. 그러나 정반대의 상황에서는 침묵한다. 한 사람의 특별한 순종으로 그가 속한 공동체 전체가 큰 복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불공평하다고 항의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서,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이 복을 받고 더 나아가 세상의 많은 민족이 복을 받게 되었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항의하지 않는다.   형사법정의 경우같이 사람이 관여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의인과 죄인이 서로 상벌을 공유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의인은 상을 받고 죄인은 벌을 받게 해야 한다. 그러나 전쟁의 상황같이 사람이 개인사에 개별적으로 관여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의인과 죄인이 서로 상벌을 공유하는 것이 현실이다. 경우에 따라서 죄인이 의인에게 주어질 상을 받기도 하고 의인이 죄인에게 주어질 벌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개인 영혼의 구원은 공동체의 운명과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영원한 법정에서는 개인이 행한 것에 대해서 자신만이 책임을 진다. 비록 육신적으로는 부당하게 고난 받고 무고한 죽음을 당할 지라도,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내가 지옥 가지 않고 다른 사람의 선행 때문에 내가 천국 가지 않는다. 의인과 죄인이 함께 벌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법정을 배경으로 하는 당위이고 의인과 죄인이 함께 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인간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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