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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선교보고 (김옥남 권사님 작성) Publish on October 10,2014 | 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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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교위원회
댓글 0건 조회 5,601회 작성일 14-10-10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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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24일부터 9 3일 까지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선교 여행을 떠났다. 11명의 단원들이 모여 기도하고, 교회 여러분들의 기도로 모든 선교 여행이 잘 끝났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번 선교의 목적은 나에게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선교 팀과 같이 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1937-38년 사이에 소련의 스탈린에 의해서 추방된 고려인들의 강제 이주와 정착 등을 알고 싶어서였다.

 

인천 공항을 떠나 Almaty, 카자흐스탄 공항에 도착,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어져서 알마티 선교센터에서 여장을 풀었다. 우리 교회에 지금 나오고 있는 “또오냐”가 다녔다는 은혜교회는 그 규모도 크고 교인들도 모두 다 너무나 진지하며, 열심들이었다.

 

첫 사역지인 알마티 산동네를 방문했다. 가파른 산길에 만들어진 천국계단은 올라가는데 숨이 찼지만 우리 교인들의 도움으로 만들었다는데 더욱 감명이 깊었다. 안경, 사진, 한방 팀, 건강상담 사역 후에 우스토베로 향했다. 산동네 사람들은 많이 걸어서인지 모두들 건강했다.

 

우스토베 청년 센터로 가는 길은 멀고 공사 중이라서 평탄치가 않았다. 저녁을 먹은 후 Youth 학생들이 준비한 찬양곡, 부채춤, 율동과 찬양, 성극 등을 잘 보고 난 후에 잠자리에 들었다.

 

목요일 새벽부터 시작된 홍목사님의 부흥집회는 모두 7번으로 예배, 기도, 가정, 친교, 헌금, 성경 읽은 방법, 전도에 관한 지킬 사항들이어서 교인들도 은혜를 받고, 우리에게도 도전이 되었다.

 

음식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풍성했고, 우리 입맛에 맞는 음식이어서, 탈 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다음 사역지는 곡수 마을, 달니니 보스특(한국학교의 산실)이었다. 1937년 강제 이주 후에 뜻있는 사람들이 1938 11월에 세운 제르진스키 학교이었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있다. 고려인들의 pride가 컸다. 오늘 사역엔 젊은 사람들과 여자들도 많았고, 남자들은 모두다 심한 노동으로 손끝이 둔해져서, 당뇨 측정시 피를 뽑는데 애를 먹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잘못된 식생활 습관과 운동부족으로, 고혈압, 당뇨환자들이 많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치수를 재어주고, 건강에 대한 주의 사항 등에 대한 상담을 할 뿐이었다. 대부분의 고혈압 환자들은 비용 관계로 약을 계속해서 먹지를 않고, 먹었다 안 먹었다 해서, 치료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우수토베 청년센터로 돌아와서 사역을 했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인원 제한도 했었다. 우리 교인들의 헌금으로 마련된 어린이 놀이터는 잘 꾸며져 있었고, 감사하다는 인사도 적혀있었다.

 

이 지역의 물은 석회질이 많아서 관절염 같은 병이 많다. 이번에 박테리아 제거는 물론, 석회질을 제거할 수 있는 새 filter(정수기)를 가져가서, 원권사님이 설치해 주셔서 모두들 행복해 했다.

 

홍목사님은 컴퓨터 방에서 무선 인터넷을 설치해 주셨고, 전화 케이블에 문제가 있었던 것도 발견해서 고쳐주셨고, 사용방법까지 지도해 주셨다.

 

이곳의 문제는 생산공장이 없어서 실직자가 많았다(30%). 젊은 사람들은 도시로 나가서 보이지를 않았다.

 

우리 팀이 찍어준 사진들이 그들을 즐겁게 해 준데 감사하고 김신원형제님의 한방침은 대 인기였다.

 

한반도를 등지고 소련 볼라디보스토크, 하바로프스크 등 원동지역에 정착하여 살던, 우리 동포 혹은 그의 후예들이 1937 10 9일부터 1938 4 10일까지 스탈린의 명령으로 강제 이주를 당해, 중앙아시아 각처에서 살고 있다. 고려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은 우주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이다.

 

당시의 17-8만 명에 달하는 대량의 한인들이 시베리아를 거쳐 중앙아시아로의 24일간의 이동 과정에서 기아와 병마로 반 이상이 죽어갔다. 황량한 모래사막과 갈대가 무성한 소금 땅에 도착한 그들에게 자연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도구와 재료라고는 갈대와 열손가락밖에 없었다. 이러한 정착 과정에서 한인들이 살아나가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쳤다. 여기서 힘없는 국가(나라 잃은)의 서러움을 볼 수가 있었다.

 

강제 추방의 주요 원인으로는 “스탈린 정부 또는 스탈린의 소수민족에 대한 병적인 불신”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1937년초 일본군이 연해주 침략을 위해서 한인들을 간첩으로 이용한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돌았다. 공식적인 이유는 “극동지방에 일본 정보원들이 침투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다.

 

강제 이주에 앞서 소련정부는 한인 지도급 인사들 2,500여명을 처단했다고 한다. 간첩 행위를 했다는 누명을 씌워 연행한 후 처형해서 가족들은 그들의 행방을 몰랐다.

 

“김 니꼴라이의 경험 이야기”

 

카작스탄과 우주베키스탄에 당도할 때까지 아무런 위생시설이 없어 많은 사람들이 병과 비 인간적인 상황으로 도중에 죽었다. 때는 늦가을, 눈비가 내리고 추위가 닥쳐와서 당장 집이 필요했다. 그러나 집을 지을 재료도 없었다. 땅굴을 파고, 지붕을 만들어 그 안에 식구들이 살게 했다. 우리가 처음 내린 곳은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우스토베라는 곳으로 소금이 하얗게 깔린 버려진 땅, 나무 한 그루 안 보이고 찬 바람만 부는 메마른 사막에 10월에 도착했다. 빗자루 쓸어 내듯 죽는 사람이 많았다. 땅굴을 파고 갈대를 엮어 지붕을 씌워 그 추운 겨울을 지내고, 다음해 봄에 싹이 난 풀을 뜯어 먹었다. 버려진 땅에 쟁기도 없어, 손으로 파기도 하여 손가락이 굵은 노인도 많았다.

 

이러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고려인들은 1937-1940년에 본토인들이 버렸던 땅을 개척하였고, 갈대 밭은 일구어 벼 농사를 시작하였다. 결국 많은 소득을 거두어 들이는 결실을 이루었고, 1940년에는 고려인들은 깨끗한 주택을 건설하게 되었고, 자체 발전소를 비롯한 문화생활 기반을 건설하였다.

 

1956년부터는 흐로시초프의 시대로 전환되면서 스탈린 시대의 강압적인 고려인 통제는 많이 완화되었다. 소련 해체 이후에는 중앙아시아 국가 내에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그 지방의 고유언어(자민족 중심의 언어정책)를 익혀야 했다.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겹쳐 고려인들은 다시 연해주로 재 이주하는 실정이다.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은 구 소련 시기와는 다른 사회, 경제적 환경을 맞이하게 된다. 국가별로 다양한 민족 주의적 징후가 나타났고, 고려인들의 강한 도시화 현상 및 국내외 이주로 특징지어진다. 새로운 언어를 습득해야만 하는 시점에 놓여있다. 중앙아시아에서 살기 위해서는 러시아어 만은 안되고, 토착어를 배워야만 하고, 이주나 경제적인 도움을 위해서는 영어나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고려인의 대부분이 알마티, 잠불, 남 카작스탄과 같은 남부 카자흐스탄 지역의 도시에 밀집해서 살고 있다.

높은 교육열로 자녀들 교육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자녀 교육을 위해서 도시로 이주하는 가정이 많다. 고려인들 중에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비율은 카작스탄 전체 평균보다 2배가 넘는다고 한다.

 

소련은 당시의 국내, 외적인 정세를 위기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소수민족을 분산 배치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고려인들을 강제적으로 혹한의 황무지로 내 몰았다.

1937 9월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는, 고려인들에게는 엄청난 고통과 시련을 가져다 주었다. 그들의 강인성으로 살아남았지만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고하고 싶을 뿐이다.

 

다음 두 개의 시는

중앙아시아로 가는 과정과 그들 앞에 있었던 아픔, 고통, 황무지에서 살아 남아야 하는 어려움을 그린 시이다.

 

 

고려인 아리랑

 

버려진 땅

짐짝처럼 부려진 삶

아리랑 글도 못쓰게 했던……

아리랑 아라리요.

 

내 나라 얼어 붙어

그 원한

손발로 갈라터져도

아이들은 모스끄바로 보내자……

 

무거운 삶 휜 허리

아리랑 고개 눈물로 넘으며

감자로 계란사니

계란은 닭이 되고

마늘은 땅이 된다.

 

살아 넘지 못한 이

아리랑 고개에 흙으로 위로하고……

아라리요 서룬 눈물

살아남는 몸부림

 

이제는 넘었느냐 아리랑 고개

지친 다리 주무르는 사랑하는 사람아

아리랑 고개에 웃음 꽃이 피어난다.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다 넘었네.

 


우쉬또베의 한

 

일구 삼칠년

돼지처럼 끌려 차량에 갇힌 채…

밤낮없이 달리던 기차바퀴…

어디로 얼마나 가는가. 우리는

불안함은 차량 틈 사이로 끝없이 내달린다.

 

젖 빨던 아이

말라버린 엄마 가슴

드디어, 아이의 입술마저 말라버리고…

싸늘한 보자기 또 하나

에미의 한이 되어 차창 밖으로 던져진다.

울부짖는 절규는

달리는 기차바퀴에 갈기갈기 찢어져 버리고…

 

버려진 땅

내팽개쳐진 삶의 허접한 거적들

옮기는 걸음마저 얼어 붙는

동토의 벌판

시린 손에 흐르는 피

얼어 붙은 돌 위에 뿌리며

토굴을 파 두더지가 된다

 

사람이 소가 되고

소가 두더지 되어

밤이면 살아 남은 새끼, 지어미 가슴

파고들 제, 시린 등가죽으로 틀어막는

토굴의 구멍, 구멍들

긴긴 밤 서러운 눈물이

싸늘한 토굴보다 더 슬픈 절망을 녹인다.

 

일구고 풀칠한 한세월

우쉬또베

역사(驛舍)의 노송도 가지를 내리고

눈물의 여로에

입이 얼어 붙은 채

그저 말없이 서 있을 뿐

 

 

Reference(참고 서류)

-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구전 설화, 이복규 진문당

- 고려문화(Culture of Korea), 유종관

- 연해주 한인의 중앙아시아로의 강제 이주와 정착 그리고 사회, 경제적 현황, 전신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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